미국과 중국이 지난달 정상회담을 한 지 불과 20일도 지나지 않은 상태에서 전기차 공급망을 두고 상대국을 겨냥한 규제 조치를 내놨다. 미국은 중국산 부품이 들어간 배터리를 쓰는 전기차에 대해선 보조금을 주지 않기로 했다. 중국도 이에 앞서 흑연 등 전기차 핵심 광물에 대한 통제권을 더욱 강화하고 나섰다.
2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미국 재무부는 전날 중국에서 생산되는 부품·핵심 광물이 들어간 배터리를 쓰는 전기차에 대해선 보조금 지급 대상에서 제외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외국 우려 기업(FEOC)' 규칙안을 발표했다. 현재 배터리 부품과 핵심 광물 원산지 요건을 충족하고 북미에서 최종 조립된 전기차를 대상으로 제공하는 최대 7,500달러(약 980만 원)의 세액공제를 FEOC엔 주지 않겠다는 의미다. '외국 우려 기업'은 "중국·러시아·북한·이란 정부의 소유·관할에 있는 기업'으로 규정했다. 중국산 부품이 들어간 전기차는 2024년부터, 중국산 핵심 광물이 쓰인 전기차는 2025년부터 각각 이번 규칙이 적용된다.
물론 중국이 25% 미만 지분을 보유한 합작 기업은 FEOC로 보지 않겠다는 '여지'를 남겼다. 하지만 결국 "25% 이상은 중국에 의존하지 말라"는 '탈(脫)중국 가이드라인'을 준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평가가 많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전기차 공급망에서 중국의 역할을 질식시키려는 조치"라고 짚었다.
이 때문에 지난달 15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미중 정상회담의 약발이 벌써 떨어진 게 아니냐는 진단이 나온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당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만나 "경쟁을 책임감 있게 관리하자"며 충돌 예방 필요성을 강조했다. 두 정상 간 유의미한 합의는 없었으나, 큰 마찰도 없었다. 다만 공급망 경쟁 이완에 대해선 미온적 태도를 드러냈다는 점에서, 이번 FEOC 규칙안 발표는 예고된 결과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반도체·전기차·인공지능(AI) 등 첨단 기술 분야에서 중국을 따돌리기 위한 압박은 지속될 것이라는 관측이 사실로 드러난 셈이다.
실제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장관은 2일 레이건 국방포럼에서 "베이징은 우리가 겪은 최대 위협이다. 중국은 우리의 친구가 아니다"라고 밝혔다. 이어 "중국은 매일 미국의 수출 통제를 어떻게 피할지 궁리 중"이라며 "통제 강화에 대해 우리가 더 진지해져야 하는 이유"라고 강조했다.
핵심 광물 주도권을 쥐고 미국을 견제하겠다는 중국의 근본적 태도도 변하지 않았다. 관영 신화통신에 따르면 중국 국무원은 1일 리창 총리 주재로 열린 상무회의에서 '광물자원법' 수정안을 논의·채택했다. 수정안에는 핵심 광물에 대한 △비축 시스템 강화 △탐사·개발·저장 가속화 △국제 협력 강화 등 내용이 담겼다.
같은 날 중국은 전기차 배터리 핵심 원료인 인조·천연 흑연 수출 시 상무부 승인을 먼저 받아야 한다는 내용의 '수출 통제' 조치도 시행했다. 지난 8월 차세대 전력 반도체 소재인 갈륨, 광섬유 원료인 게르마늄의 수출 통제에 이어, 광물 통제권 범위를 '전기차 소재'로도 확대한 것이다.
다만 중국 상무부는 해당 조치 시행 전날인 지난달 30일 "특정 국가를 겨냥한 것이 아니다"라는 논평을 냈다. 미국과의 갈등 재확산 분위기는 애써 누르려는 모양새였다. 베이징의 한 외교 소식통은 "시 주석이 지난달 미국까지 날아가 갈등 이완 방안을 논의한 상황에서, 미중 간 긴장이 다시 고조되는 그림을 피하려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실제 중국은 최근 "외국 기업을 동등하게 대우하겠다"며 외국인 투자자들을 향한 유화적 제스처를 잇따라 발신하고 있다. 중국 경기침체를 야기하는 외국 자본 이탈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미중 갈등이라는 점에서, 미국과의 공급망 경쟁 심화는 당분간 피하려 할 공산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