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란 무엇인가?

입력
2023.12.02 18:00
[한창수의 마음 읽기] 고려대 구로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어느 날 차 한잔을 달라며 젊은 동료가 연구실을 방문했다. 인턴을 마치고 병원에서 일하기 시작한지 일 년이 채 안 되는 청년이었다. 종종 복도에서 마주칠 때면 항상 밝은 표정으로 인사하며, 일년 차 생활도 다 지나가고 있어서 잘 지낸다 생각하는 중이었다.

차를 마시던 그 친구는 무심히 “내가 이 일을 왜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며 말을 시작했다. 낯설고 힘든 일에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터였고, 매달 월급받고 저축하면서 이제 성인이 된 것 같아 뿌듯하기도 하다.

조금씩 좀 더 숙달되면 전문의가 되는 것은 그냥 정해진 순서일 것 같은데 “왜” “무엇을 위해” 지금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스스로 잘 설득되지 않는 순간이 많다고 말한다.

대학에 입학할 때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직업을 연마해 이 사회에 기여하겠다는 말을 하기도 했고 그 마음은 지금도 그대로인데, 요즘은 그저 안정적인 직업이라는 말에 무의식적으로 동조해 살고 있는 마음이 점점 더 커지는 것 같아서 일 재미가 없어진다. 지도 교수님은 열심히 공부해 나중에 대학에 남아 연구도 더 하라고 격려하신다 하는데, 그게 자신에게 맞는 인생인지도 고민이다.

이 친구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의 의미와 미래의 진로를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원래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일들이 잘 되는 것 같으면 그저 하루 일과에 집중해 살아가다가도 역경에 닥치고 일이 어려워지면 ‘사는 의미’를 찾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학생들이 공부가 잘 안되면 재미가 없어지고, 공부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뻗대는 것과도 비슷하다.

동기 심리학자들은 인간이 하는 일(Work)을 몇가지로 나누어 받아들인다 말한다.

첫 번째는 소명(Vocation, Calling)으로서의 일이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에는 몸을 쓰는 일을 천한 것으로 여겨 노예들에게 다 맡겼다. 그저 우주 원리와 철학을 생각하는 것이 고귀한 것이었으며, 이상향에 가까이 가는 것이라 여겼다 한다.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서야 어떤 일을 하더라도 수련을 통해 신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여기기 시작했고, 못 하나를 만드는 일도 세상에 기여하는 숭고한 일이라 말하기 시작했다.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일은 이 사회와 사람들에게 기여하는 바가 있고, 열심히 일하는 것이 인간의 의무라고 하면서 소명 의식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이들에게 일은 그저 노동이 아니라 숭고한 소명이었고, 죽을 때까지의 천직이었다. 소명은 내 삶의 의미와 깊이 연결되어 있고 신이 이 자리에서 이웃을 섬기라 명한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해내겠다 결심하는 것이다.

다음은 진로 또는 커리어(Career)로서 일을 바라보는 것이다. 현대 산업, 자본사회에서는 일을 통해 돈을 벌고, 경력과 승진을 통해 계층 상승하는 것이 중요하게 되었고, 이것이 일의 주요한 동기로 작용하는 것이다.

소명이 사회적인 의무를 강조하는 것이었다면 커리어를 강조하는 사람에게는 일에서 얻는 성취감이 가장 중요하다. 이들에게 성공은 승진과 출세, 권력과 명예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좀 더 숭고해야 할 정치·의료·학문 세계에도 이런 동기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세 번째는 그저 기본적 욕구 충족을 위한 직업(Job)으로서 일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들에게 일은 그저 호구지책인 것이다.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급여와 복지, 안정성이며 일이라는 건 그저 견뎌낼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물론 어느 하나의 측면으로만 자신의 일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사회와 공동 이익에 기여하는 소명의식이 중요하긴 하지만, 개인의 경력 개발과 경제적 이익, 수입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 사회에 기여하기 위해서 다른 모든 걸 버리고 일을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십중팔구 위선자이다.

문제는 어느 한쪽에만 지나치게 치우친 마음으로 일을 하게 될 때이다. 일하는 이유의 대부분이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과 이웃 사랑이라면 진정 선한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가족과 자신의 생계와 개인적 성취를 아예 무시해도 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만약 일을 하는 동기의 많은 부분이 본인의 목적 달성과 경제적 성취, 명예를 위한 것이라면 주변 사람들과 조직을 이용하거나 착취할 가능성이 많다. 피터 드러커도 “능력과 열정은 넘치지만 진실성이 부족한 사람은 그 조직을 망하게 할 것”이라 말하지 않았던가.

개인적으로는 호구지책으로만 일을 바라보는 순간이 특히 위험하다. 내 일의 의미를 찾을 수 없고, 매일 하는 일이 재미없을 것이기 때문에 쉽게 무기력에 빠지게 된다. 나이 먹을수록 갈아탈 직장도 없어질 것이다. 앞으로 살아갈 수십년을 월급날 때문에 살 수만은 없지 않은가.

이제 일년 차 생활이 끝나가는 청년에게 본인의 일을 소명, 진로, 직업 중에 어떤 측면으로 주로 보는지 묻지는 않았다.

삶의 의미나 일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고, 내가 좋아하고 끌리는 부분에 집중하여 살아가면 그만이다. 다만 타인의 삶과 성취를 부러워하고 흉내내지 않기를 바란다.

청년은 자신의 시간을 더 보내면서 지속적으로 일을 하고, 또 본인도 만족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세 가지 일의 측면을 적절히 조절해 살아가게 될 것이다.


권대익 의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