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내년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3개월 만에 다시 낮춰 잡았다. 반도체를 중심으로 수출과 투자가 살아나더라도, 고금리에 위축된 소비 심리가 경기 회복 속도를 늦출 것이란 분석이다.
한은은 30일 발표한 ‘11월 수정 경제 전망’에서 올해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종전과 동일한 1.4%, 내년 성장률은 0.1%포인트 낮춘 2.1%로 전망했다. 내년 성장률 전망치는 2월 2.4%로 제시된 뒤 5월(2.3%)과 8월(2.2%) 조금씩 낮아졌는데, 이달도 추가 하향을 피하지 못했다. 전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내년 한국의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2.1%에서 2.3%로 0.2%포인트 올린 것과 상반되는 결과다.
내년에도 수출과 설비투자가 경기 개선 선봉에 설 것으로 한은은 전망했다. 구체적으로 올해 재화 수출이 2.3% 늘고, 내년엔 증가폭이 3.3%까지 커질 것으로 봤다. 글로벌 반도체 경기 부진이 완화하는 가운데 주요국의 신성장 산업과 공급망 재배치 관련 투자가 늘어날 것이라는 전제가 깔렸다. 설비투자 역시 반도체 기업의 첨단 공정 투자, 이차전지 등 친환경·신성장 분야 투자 개선에 힘입어 올해 0.4% 감소에서 내년 4.1% 증가 전환을 이룰 것으로 예상됐다.
문제는 내수다. 고물가와 긴축 여파로 민간 소비는 예상보다 더딘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내년에도 나라 밖 소비는 해외여행 재개로 높은 증가세를 이어가겠지만, 국내 재화 및 서비스 소비는 크게 나아지지 않을 것으로 예상됐다. 고금리 상황이 여전한 데다, 코로나19 보복 소비 수요도 한풀 꺾였기 때문이다. 건설투자 역시 신규 착공 위축으로 공사 물량이 감소해 부진한 흐름을 보일 것으로 전망됐다.
국제유가나 글로벌 제조업 경기 등 전제 조건이 변하면 경제 전망도 변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한은은 두 가지 시나리오 분석을 추가로 내놓았다. 지정학적 갈등이 다시 심화하면서 원자재 가격이 상승하고 이차 파급효과가 커지는 최악의 경우 내년 성장률이 1.9%까지 낮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인공지능(AI)의 빠른 진보로 반도체 등 글로벌 제조업 경기가 빠르게 반등하는 장밋빛 가정하에선 내년 성장률이 2.3%까지 오를 것으로 추정했다.
내년 경제 상황도 녹록지 않지만, 부양책이 필요한 수준은 아니라는 게 이창용 한은 총재의 평가다. 이 총재는 이날 통화정책방향 기자간담회에서 “전 세계 성장률로 볼 때 2%가 너무 낮은 수준은 아니다”라며 “지금 상황에서 섣불리 경기 부양을 하고 금리를 낮추면 부동산 가격만 올릴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취약계층을 선별적으로 지원하면서 성장률 문제는 중장기적 구조조정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