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짝 웃으며 아빠에게 안긴 소녀, 목소리를 잃었다..."인질들 트라우마는 이제 시작"

입력
2023.11.29 20:00
81명의 인질, 돌아왔지만...'트라우마 위기'
아이가 감당 못할 충격에 목소리 잃기도
구출되고 전쟁·가족 사망 접해 '2차 충격'
"피해자 회복 속도 맞춰 정보 제공돼야"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가 납치한 인질 약 240명 중 81명(이스라엘인 60명·외국인 21명)이 풀려났지만,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가족이 사망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접한 충격과 억류 당시 학대당한 기억이 이들을 괴롭히고 있다. 특히 하마스가 납치한 미성년자 인질 수십 명이 트라우마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

돌아왔지만...아이들은 여전히 그날에

지난 25일(현지시간) 50일 만에 기적처럼 살아 돌아온 에밀리(9). 딸이 죽은 줄 알고 "인질로 붙잡혀 고통받기보다 죽은 게 차라리 다행"이라고 절규한 아버지 토머스 핸드의 인터뷰 이후 전쟁 참상의 상징으로 떠오른 소녀다. 토머스는 28일 미국 CNN방송 인터뷰에서 "딸의 상태에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에밀리의 얼굴은 창백했고 볼이 움푹 파였으며 금발 머리엔 머릿니가 가득했다. 기억 상실 증세도 보였다. "얼마나 오랫동안 집을 떠나있었던 것 같으냐"고 묻자 에밀리는 "1년"이라고 답했다.

쾌활했던 에밀리는 석방 이후 모든 말을 속삭이듯이 한다. 토머스는 "딸의 입술에 귀를 갖다 대야 하려는 말이 들릴 정도"라며 "억류돼 있는 동안 아무 소리도 내지 않도록 (하마스에) 훈련을 받은 것 같다"고 했다. 집에 돌아온 에밀리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우는 동안에도 울음소리가 새 나가지 않도록 숨을 죽였다.

에밀리와 함께 풀려난 힐라(13)의 삼촌 야이르 로템은 "낮에는 속삭이는 정도로만 말하는 게 허용됐지만 밤에는 이마저도 금지됐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27일 석방된 에이탄 야할로미(12)도 몸은 다치지 않았지만 말을 잃었다. 이스라엘 매체 하레츠에 따르면, 에이탄은 2주 넘도록 밀실에 홀로 갇혀 있었다. 하마스 대원들은 지난 7일 이스라엘 기습 공격 당시의 잔혹한 영상을 보도록 강요했고, 에이탄이 울면 "조용히 하라"며 총으로 위협했다. 그의 할머니는 "(에이탄이) 다시 말하게 되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라며 울먹였다.

풀려난 인질 중엔 트라우마에 취약한 미성년자가 많다. 미국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81명 중 미성년자가 30명(5세 이하는 8명)이고 풀려나지 못한 미성년자도 6명이 더 있다. 이스라엘의 임상 심리학자인 아에렛 군다르-고센은 인질들의 귀환은 기쁜 일이지만 "아직 해피엔딩이 아니다"라고 경고했다.

가족의 부고는 ‘2차 충격’


억류 기간에 외부와 차단돼 있었던 인질들은 가족이 사망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노암(17)과 앨마(13) 남매는 "가족을 다시 만나자"고 다짐하며 50여 일을 버텼다. 그들을 납치한 게 누구인지도, 전쟁이 시작됐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25일 풀려난 직후 둘은 "어머니는 납치된 날 사망했고, 아버지는 하마스에 억류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소식을 할머니에게 듣고 더 큰 슬픔에 빠졌다. 미국 워싱턴포스트는 "남매는 슬픔을 천천히 받아들이고 있다"고 전했다.

이스라엘 복지부는 인질들의 트라우마 관리 지침을 뒤늦게 발표했다. 억류 중 발생한 사건에 대해 자세히 묻지 말고, 미성년자 인질이 부모를 찾으면 생사 여부에 대한 확답을 피하라는 내용 등이 포함됐다. 지침 작성에 참여한 애셔 벤-아리에 히브리대 교수는 "피해자 스스로 통제력을 회복하는 게 중요하다. 정보는 회복 속도에 맞춰 제공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유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