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시해된다. 총을 빼든 이는 중앙정보부장이다. 오만무도한 경호실장은 대통령과 함께 숨진다. 1979년 10월 26일 서울에서 벌어진 일. 하지만 중앙정보부장은 김재규가 아닌 김구평(이병헌)이고, 경호실장은 차지철이 아니라 곽상천(이희준)이다. 대통령은 박정희가 아닌 박통(이성민)으로 묘사된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2020)은 그렇게 역사를 다루면서도 역사에서 비켜서있다.
□ 27일까지 관객 213만 명을 모으며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서울의 봄‘ 역시 다르지 않다. 12·12 군사반란을 다룬 이 영화에서 1979년 12월 12일 반란을 주도한 보안사령관은 전두광(황정민)이고, 군의 정치개입을 막기 위해 혼신을 다하는 수도경비사령관은 이태신(정우성)이다. 전두환과 장태완의 변형이다. 전두광의 오랜 친구 9사단장은 노태우 대신 노태건(박해준)으로 등장한다. 이들 외에도 실존인물을 바탕으로 한 여러 캐릭터들이 나오나 모두 실명이 아니다.
□ 전두환을 전두환으로, 장태완을 장태완으로, 김재규를 김재규로 표기하지 않는 이유는 인물들을 좀 더 자유롭게 표현하기 위해서다. 이름이 전두환이 되면 영화적 재미보다는 사실적 묘사에 더 신경 써야 해서다. 다큐멘터리가 아닌 이상 상업 영화로서는 선택하고 싶지 않은 현실이다. 실명 회피는 소송의 위험을 피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다. 실명으로 나오는 실존인물에 대한 묘사가 조금만 잘못돼도 법정싸움이 벌어지기 쉽다. 할리우드 영화사들에 비해 자본력이 약한 한국 영화사들로선 고육지책인 셈이다.
□ ‘남산의 부장들’과 ‘서울의 봄‘은 우리 현대사를 다시 돌아보고 현실을 되짚어보게 한다는 점에서 사회적 의미가 있다. 하지만 실명 아닌 역사적 인물들의 스크린 속 묘사는 역사를 지나치게 허구화할 수 있는 위험이 따른다. 넷플릭스 드라마 ‘크라운’(2016~2023)은 영국 영화 엘리자베스 2세와 다이애나 왕세자비 등을 실명으로 등장시키면서도 재미와 의미를 함께 빚어낸다. 전두환이 전두환으로 나오는 극영화의 등장은 한국 영화의 또 다른 일보전진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