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지장갑에 담긴 뜻을 살리려면

입력
2023.11.28 19:00
25면

편집자주

세상 언어들의 이모저모를 맛보는 어도락가(語道樂家)가 말의 골목골목을 다니며 틈새를 이곳저곳 들춘다. 재미있을 법한 말맛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며 숨겨진 의미도 음미한다.

정치적 올바름 운동으로 많은 용어가 바뀌는 중이다. '벙어리장갑'도 언어 장애인을 낮잡는 '벙어리' 때문에 이제 '엄지장갑'이나 '손모아장갑' 같은 대체 용어도 쓴다. 알맹이의 겉을 감싸는 기호가 바뀌는 효과도 있으나 말하는 이의 속내도 함께 안 바뀌면 도루묵일 때가 많아, 정치적 올바름은 다소 시혜적이거나 작위적일 수도 있다. 장애인이 더 잘 살도록 하는 행동과 조치가 없다면 말잔치에 그치기 십상이다.

물론 말 새로 바꾸기도 그런 행동의 일환이다. '벙어리장갑'을 여전히 많이 쓰는 것도 비하의 느낌이 꼭 없다기보다는, 비장애인들의 무신경 탓일 수도 있다. 다만 말을 바꿔도 결국은 '○○ 장애'라고 한자어로 늘리는 반면, 영어권 청각장애인은 대개 스스로를 고유어인 deaf로 일컫는 편이다. 표현은 언어마다 또는 개인마다도 다르고 장애인 정체성이나 인권의식이 현대적 개념이듯이 시대가 흐르면서도 달라지므로, 기존의 언어를 영원토록 고수하는 게 바람직하지는 않다.

'손가락장갑'과 달리 '벙어리장갑'은 엄지만 따로 가르고 나머지 네 손가락은 함께 감싼다. 손가락 부분이 막혀 있어서 생긴 이름 같다. 영어 dumb-bell(벙어리 종)도 소리 없이 연습 삼아 흔드는 교회 종을 일컫다가 '아령'이 됐다. 啞鈴(벙어리 아, 방울 령)은 영어의 번역 차용어다. 영어 dumb은 주된 뜻이 '바보'로 옮겨갔는데, 합성어 요소로서 원래의 속성에서 뭔가 모자람도 함의하나 이제 dumbbell 말고는 잘 안 쓴다.

'벙어리저금통'도 돈 넣는 구멍만 하나 있어서 붙은 이름일 텐데, 이제는 '돼지저금통'이나 '저금통'만으로도 통한다. 다만 '벙어리'는 푼돈을 모으는 조그만 통도 일컫기에 동어반복 합성어와도 비슷하다. '항아리(缸+아리)'와 유사한 파생어거나 '바구니'나 '방구리(물 긷거나 술 담는 질그릇)'와 관계있을지도 모르겠다.

손모아장갑, 먹자골목, 떴다방, 척척박사 등 비통사적 합성어는 일상의 생생한 느낌을 주며, 조어법으로는 통사적 합성어 '엄지장갑'이 깔끔하다. 둘 다 사용 빈도는 얼추 비슷하다. 조선말대사전은 '통장갑'이 주표제어로 나온다. 통마늘, 통닭 등 '통째(덩어리)'를 뜻하는 접두사 '통-'이 쉽게 와닿아 대체어로서는 손색없는데 슬슬 자리 잡아가는 '엄지'와 '손모아'에다 또 후보를 늘리기는 좀 곤란하다.

1900년부터 쓰인 스웨덴어 tumvante[툼반테: 엄지 tum, 장갑 vante]와 얼개가 똑같은 '엄지장갑'은 우연의 일치로 스웨덴어와 한국어에만 있는 표현이다. 중앙아시아 언어와의 접점도 보인다. '장갑'의 뜻인 카자흐어 биялай[비얄라이], 몽골어 бээлий[베엘리]는 '벙어리'와 우연히 비슷할 공산이 크지만 모종의 관계를 생각해볼 수는 있겠다.

지금은 주로 수어가 농아 소통 수단이지만 미국은 특히 19세기 후반 농아교육에서 독순술로 음성언어를 익히도록 하는 구화법(oralism)이 널리 퍼졌고 20세기 중반까지도 이어졌다. 어느 다큐멘터리에는 학생이 수어를 못 하도록 장갑을 끼워 묶기도 했다는데 구체적인 문헌 자료가 없어서 체계적 억압보다는 일시적 또는 개별적 방법이었을 듯싶다. 한국 농아교육에 미국 영향도 있겠으나 '벙어리장갑'의 어원이라고 추정할 증거도 없다.

가죽이나 천이 손가락을 감싸서 트이지 않고 막힌 장갑이라 생긴 이름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이미 굳어진 '벙어리장갑'이 구체적으로 장애인을 낮잡는다고 보기는 어렵겠으나, '엄지장갑'이나 '손모아장갑'이라는 대안도 염두에 두면서 함께 사는 시민으로서 동료 의식도 다잡는다면 겨울이 더욱 따뜻할 것이다.

신견식 번역가·저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