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이 '막대한 국가 부채를 질 것인가, 국가 미래를 위한 정부 사업을 대거 취소할 것인가'의 기로에 섰다.
독일 정부는 코로나19 팬데믹 대응에 쓰려다가 남은 정부 예산 600억 유로(약 85조7,730억 원)를 기후 위기 대응과 미래 산업 투자에 활용하려고 했으나, 헌법재판소가 예산 용처 변경에 위헌 판결을 내리면서 제동이 걸렸다. ①기후 대응과 미래 산업 투자 사업을 포기하거나 ②대규모 국채를 발행해 사업을 진행해야 하는데, 둘 다 쉽지 않다.
독일 경제엔 먹구름이 끼었다. 투자를 통해 경제 침체에서 벗어나겠다는 정부 구상이 타격을 입게 됐고, 독일 정부에 대한 신뢰도 하락도 불가피하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24일(현지시간) "신속하게 해결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연립정부를 꾸린 3개 정당(사회민주당·녹색당·자유민주당)의 지향점이 달라서 연정 내 합의도 불투명하다.
2021년 12월 숄츠 정부는 △친환경 에너지로의 전환과 기업의 탄소중립 지원 등 기후위기 대응 △반도체·정보통신 등 미래 산업 투자 등을 약속했다. 그러나 재원이 마땅치 않았다. 헌법에 정부가 국내총생산(GDP) 0.35%까지만 새로 부채를 조달할 수 있게 제한하는 '부채 제동장치'가 규정돼있기 때문에 대규모 국채 발행은 불가능했다.
마침 코로나19 대응을 위한 국채 발행을 통해 마련한 예산이 있었고, 정부는 이를 '기후 및 변혁 기금'(KTF)으로 전용해 2023~2024년도 활용하기로 했다. "신규 투자가 팬데믹 이후 독일 경제 회복을 위한 촉매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게 정부 논리였다고 독일 도이체벨레(DW) 등은 보도했다.
그러나 최대 야당인 기독민주당·기독사회당 연합이 "의회 승인 없는 예산 사용은 위헌"이라며 헌법소원을 제기했고, 지난 15일 위헌 판결이 나왔다. 헌재는 ①위기 상황일 때만 0.35%라는 한도를 초과할 수 있는데 KTF 사업은 위기 상황과 거리가 멀다고 봤고 ②2021년 부채로 기입한 600억 유로를 2, 3년 뒤에 쓰는 것 역시 불법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올해 미집행 예산과 내년 예산 집행이 전면 중단됐다.
숄츠 총리는 24일 "기후 위기에 잘 대응해야 한다. 독일을 현대화하겠다는 의지도 확고하다"며 사업 강행 의지를 밝혔다. 그러나 대규모 기금 마련이 어려운 만큼 사업 규모 축소가 불가피하다.
이에 정부 지원을 기다리던 관련 업계에서 우려가 커지고 있다. 로이터통신 등은 철강, 반도체, 전기차 배터리 등의 분야에서 사업 불확실성이 커졌다고 보도했다. 미국 ABC뉴스는 "지출 삭감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에너지 비용 상승 등으로 정체돼있던 독일 경제가 더욱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됐다"고 분석했다.
예산 배분을 둘러싼 부처 및 16개 주정부 간 갈등도 예상된다. DW는 "녹색당은 탄소중립 투자 축소를, 사회민주당은 수당·연금 삭감을, 자유민주당은 증세를 거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3당 연정 붕괴' 가능성도 일각에서 제기되지만, 지금 선거를 치르면 3당 모두에게 손해라 어떻게든 합의를 볼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