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1이란 이름

입력
2023.11.29 23:10
30면

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2005년 블리자드의 '스타크래프트'로 치러지는 게임 리그 방송을 보기 시작했을 때 이미 '테란의 황제' 임요환은 전설이었다. 10만 관중이 모였다는 부산 광안리해수욕장에 마련된 특설무대에서 파란색과 흰색으로 구성된 민소매 옷을 입고 검은색과 흰색의 KTF 매직엔스(지금의 KT 롤스터) 팀을 상대해 우승 트로피를 따낸 임요환의 팀은 이스포츠의 최고 인기팀이자 상수였다. 팀 내 '테란(스타크래프트의 인간 종족)' 선수들이 워낙 강해 '테란1'이라고도 불렸던 T1이란 이름의 팀이었다.

그리고 대략 20년이 흘렀다. 그때 광안리와 지금 서울 고척스카이돔은 'E스포츠'라는 이름과 큰 무대에서 컴퓨터 앞에 앉은 선수들을 보는 포맷 정도만 빼면 같은 것이 없다. 게임은 '리그 오브 레전드(LOL)'로, 스타 선수는 '페이커' 이상혁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변하지 않고 남아 있던 것은 단 두 가지. 하나는 'E스포츠의 아버지'란 별명이 붙어버린 메인 캐스터 전용준의 "뜨거운 환호, 함성과 함께 시작하겠습니다"라는 캐치프레이즈. 다른 하나는 T1이란 이름의 팀이었다.

사실 T1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이스포츠 팀이 아니다. 대기업 후원으로 따져도 창단 시점은 KTF 매직엔스와 삼성전자 칸이 먼저다. 처음부터 이름이 T1이었던 것도 아니다. 2003년 동양제과와 전속 계약을 맺은 임요환이 그의 동료들을 끌어모아 '동양 오리온'이라는 팀을 만들었지만 동양이 팀 창단을 거부하자 대안으로 등장한 SK텔레콤이 창단 형태로 인수해 2004년 비로소 'T1'이란 이름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T1이 이스포츠에 미친 영향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T1이 등장하면서 대기업의 체계적인 팀 관리와 투자가 본격화했다. SK텔레콤에 뒤질 수 없었던 KTF도 뛰어난 선수를 여럿 영입하면서 이동통신사 팀 간 라이벌리가 흥행 카드가 됐다. 삼성전자 팀 역시 스타크래프트 시대에도, LOL 시대에도 T1의 맞수 중 하나였지만, 그 이름은 지금 기록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오늘의 삼성은 T1 유니폼 왼쪽 어깨에 모니터 이름을 올려놓은 신세다.

현재 T1은 SK스퀘어로 넘어가 컴캐스트와의 합작법인으로 운영되고 있다. SK텔레콤이라는 앞 이름은 자연히 사라졌다(메인 스폰서로 지원은 계속하고 있다). 그래도 'T1'이란 이름만큼은 남겨야 했던 것은 결국 그 20년의 기억을, 수없이 들어 올린 트로피의 유산과 선수들의 열정을 끝까지 이어가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2022년 LOL 세계 대회에서 우승한 DRX는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란 표현을 남겼지만 그 표현이 끝에 가서 가장 화려하게 빛난 건 T1이라는 변하지 않는 이스포츠의 거목이 최후의 상대였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그 옛날 2005년 KTF와 삼성이 결승에서 T1을 상대했을 때 가장 극적인 드라마가 펼쳐졌던 것처럼 말이다.

"최고가 있을 곳은 T1이니까." 올해 세계 대회 우승 선수 전원과 재계약을 마친 T1이 내놓은 문구다. 20년 뒤에는 LOL 대신 다른 게임이, 페이커 대신 다른 선수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것이다. 하지만 T1이라는 이름만큼은 그때도 최고로 남아있길 바란다. 역사를 이어가는 '근본'이 있기에 우린 마음 놓고 이스포츠 드라마의 다음 편을 기대할 수 있다.

인현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