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음악사에서 후세까지 탄생과 사망을 기리는 작곡가가 몇이나 될까. 시간의 풍화와 대중의 변덕스러운 호불호를 견뎌내고 고전의 전당에 입성한 작곡가는 선택받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러시아)는 150년 전 태어나(1873), 80년 전(1943) 세상을 떠났다. 생몰 연도의 끝자리 수가 3으로 딱 떨어지니 후대 사람들이 기억하기에 편리하다. 하지만 라흐마니노프 입장에선 아쉬운 감이 없지 않을 것이다. 다른 작곡가들은 탄생과 사망을 별도로 기념받을 수 있지만, 라흐마니노프는 하나로 뭉쳐 횟수론 2분의 1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2023년인 올해만 해도 탄생 150주년이자 타계 80주기가 겹쳤다.
라흐마니노프는 클래식 음악사에서 '멜로디 메이커'로 명망 높다. 한번 들어도 기억에 진하게 새겨질 만큼 강력한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이 선율은 러시아의 자연 풍광과도 닮았다. 일주일 동안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다녀도 평지 일색에 이렇다 할 산을 만날 수 없는 수평적 풍광이 음악에 깃들어 있다. 라흐마니노프의 선율은 끊임없이 펼쳐지는 지평선처럼 레가토의 긴 호흡으로 진행될 때가 빈번하다.
라흐마니노프는 작곡가 이전에 압도적인 연주력을 갖춘 피아니스트였다. 사람들은 피아노를 장악하는 라흐마니노프의 초인적 기교를 '비르투오소(Virtuoso)'라 치켜세웠다. 서양 음악사에서 이 칭호를 얻은 대표적 작곡가로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 불렸던 파가니니, 콘서트홀의 슈퍼스타였던 리스트, 그리고 라흐마니노프를 손꼽을 수 있다.
라흐마니노프는 190㎝가 훌쩍 넘는 장신 거구에 도(Do)에서 다음 옥타브의 라(La)까지 닿는 거대한 손을 가지고 있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손바닥을 활짝 펼쳐봐야 도에서 다음 옥타브의 레(Re), 기껏해야 미(Mi)까지 닿을 뿐이다. 하지만 라흐마니노프의 손가락 폭은 30㎝에 이르러 클래식 음악사에서 가장 큰 손으로 기록될 정도다. 이 커다란 손으로 피아노가 가진 악기의 특성을 누구보다 잘 꿰뚫어 피아니즘을 한층 더 깊고 넓게 승화시켰다.
라흐마니노프의 모든 작품은 자신이 연주하는 것을 전제로 작곡됐다. 폭발적이고도 초인적인 기교가 만발하는데도 정작 스스로는 평정심을 잃지 않은 모양이다. 그의 연주를 접했던 스트라빈스키는 '연주 도중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는 유일한 피아니스트'라며 질투할 정도였다. 2023년, 라흐마니노프의 탄생과 사망을 동시에 기리며 넓고도 깊은 그의 음악 세계를 곱씹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