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총선 당시 35개 정당이 난립하면서 48.1㎝에 달했던 비례대표 투표용지가 재연될 우려가 나온다. 여야가 내년 총선에 적용될 선거제와 관련해 좀처럼 합의점을 찾지 못하면서 현행 준연동형(정당 투표·지역구 투표 연계) 비례대표제로 선거를 치를 수 있다는 전망 때문이다. 여야에서도 이준석 신당, 조국 신당, 송영길 신당 외에 다양한 창당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는 이유 중 하나다.
23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현재 49개의 정당이 선관위에 등록이 돼 있고, 9곳의 창당준비위원회가 활동 중이다. 이 중 올해 들어 창당하거나 창당을 준비 중인 곳이 12곳에 달한다. 선관위 등록이 안 된 창당 움직임까지 포함하면 60개 이상의 정당이 등장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2021년 국민의힘 대선 경선에 참여했던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장이 주도하는 '특권폐지당(가칭)'은 전날 여의도 국회도서관에서 창당발기인 대회를 갖고 창당을 선언했다. 열린우리당 의장을 지냈던 이부영 전국비상시국회의 상임고문 등도 진보선거연합정당을 준비하고 있다. 한 국회 관계자는 "진보시민사회에서 크게 네 갈래의 비례대표 정당 창당 움직임이 있는 것으로 안다"고 했다.
이 같은 '우후죽순' 창당 움직임에는 비례대표 의석을 얻어 원내에 입성하겠다는 기대가 깔려 있다. 여야 간 선거제 협상이 결렬될 경우 현행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로 선거가 치러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준연동형제를 실시하면서 정당이 늘어나고 있지만, 실제 원내 입성 가능성이 있는 정당은 2, 3개에 그칠 것"이라고 전망했다.
다만 팬덤을 보유하고 있는 전국구 인물이 비례정당을 이끌 경우 파급력을 가질 수 있다. 조국 신당, 송영길 신당 등이 이에 해당할 수 있지만, 아직 본격적인 창당 움직임은 없다. 서둘러 창당에 나섰다가 여야가 병립형으로 회귀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여야가 병립형으로 회귀한다면 조국 신당과 송영길 신당은 지역구에 후보를 내야 하는데, 야권 분열이라는 정치적 부담을 질 수밖에 없다.
다만 현행 준연동형제로 선거가 치러진다면 조국 신당, 송영길 신당도 비례정당으로 도전해 봄직하다. 더불어민주당이 지난 대선 당시 약속대로 준연동형제를 유지하되, 위성정당을 만들지 않는다면 지난 총선 당시 민주당 위성정당들이 얻은 20석(더불어시민당 17석·열린민주당 3석)의 일부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민주당 관계자는 "선거법 협상에서 구체화된 합의가 나와야 이들의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열릴 것"이라고 말했다. 내년 총선 출마 예정자들이 일단 민주당 공천을 받기 위해 노력한 뒤, 여의치 않을 경우 조국 신당, 송영길 신당을 플랫폼 삼아 출마 기회를 모색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여야 간 선거제 합의 지연도 이러한 움직임의 배경이다. 특히 민주당이 명확한 입장을 세우지 못한 탓이 크다. 국민의힘이 ①병립형 회귀 ②현행 제도 유지 시 위성정당 창당이란 비교적 명확한 입장인 반면, 민주당은 당내 의견도 수렴하지 못한 상황이다. 지난 대선 때 약속한 대로 현행 제도를 유지하되 위성정당 없이 선거를 치르게 되면, 비례대표에서 10석 이상 국민의힘에 뒤질 수밖에 없다. 병립형으로 회귀하자니 대선 당시 약속을 뒤집어야 해 명분이 마땅찮다. 반윤석열 연대에 나설 수 있는 정의당 등 진보성향 소수정당과의 관계도 고려해야 한다. 민주당은 여당과 협의 과정에서 고육지책으로 비례대표 의석 확대를 전제로 한 병립형 회귀를 시사했지만, 국민의힘은 수용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조국 신당과 송영길 신당의 창당 명분도 '반윤 연대'다. 송영길 전 대표는 지난 21일 CBS라디오에서 "윤석열 정권과 맞서기 위해 개혁적인 당이 비례대표 의석을 많이 차지하는 것이 민주당에 힘이 될 것"이라며 "반윤 연대의 텐트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도 "민주당 단독으로 200석이 불가능하다"며 "연동형 비례제도가 유지되어 기본소득당, 사회민주당, 녹색당 등 민주진보 소수정당들이 의석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