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쓰레기 주웠어요" 롤드컵 결승 앞둔 팬들 착하게 만든 '페이커'의 힘

입력
2023.11.19 12:30
리그오브레전드(LOL) 세계대회 결승전 극적 진출한 T1
'페이커' 이상혁, 4강서 상대 도발하는 제스처 거절
팬들도 경기 앞두고 "쓰레기 줍는다" 선행 릴레이


T1이 이번 결승은 정말 이겨야 해요. 이기면 월요일부터 사람들 기분 좋아져서 업무 능률도 달라질 거라니까요.


18일 국내 최대 게임 전시회 '지스타'가 열리고 있는 부산 벡스코에서 만난 게임 마니아들조차 신경은 온통 서울 고척돔에 쏠려 있었다. 현장에서 만난 박모(35)씨는 "우주의 기운이 몰렸다"고 말했다. 19일 열리는 리그 오브 레전드(LOL·롤) 월드 챔피언십 결승전 때문이다. 축구의 월드컵에 빗대 '롤드컵'으로 불리는 이 행사매년 말 세계 모든 리그의 상위권 팀들이 모여 그해 최고의 팀을 가리는 대회인데 올해는 롤의 최고 인기 스타 '페이커' 이상혁이 뛰는 한국 롤 프로 팀 'T1'이 결승에 올랐다.



'T1 대 중국'


'우주의 기운'이란 표현이 나올 만큼 T1이 쌓아 올린 서사는 극적이다. 이상혁과 T1의 롤드컵 우승은 7년 전인 2016년이 마지막이다. 지난해 롤드컵에서 결승까지 올랐지만 한국 팀 'DRX'에 3 대 2로 석패했다. 올해 국내에서 열린 리그에서도 '젠지'에 밀려 3회 연속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올해 롤드컵에서는 다른 한국 리그 팀이 모두 탈락한 가운데 최후의 보루로 남아 중국 롤 프로리그(LPL)의 '리닝'과 '징동'을 연달아 격파하고 결승에 올랐다. 결승 상대는 역시 LPL 팀인 '웨이보게이밍'이다. 이번 대회 흐름 자체가 'T1 대 중국'인 셈이라, 국내 팬들은 모두 T1의 우승을 기원하고 있다.

데뷔 10년 차 베테랑인 T1의 중심 이상혁은 올해 한때 손목 통증에 시달려 경기에 나서지 않고 쉴 만큼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롤이 아시안게임 정식 종목 중 하나로 채택되면서 국가대표 선수로 합류했지만 단 한 경기만 주전으로 뛰었다. 이 때문인지 롤드컵 초반만 해도 T1에 대한 기대치가 높지는 않았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롤드컵이 진행되고 경기를 거듭하면서 이상혁을 포함해 모든 선수들의 경기력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12일 부산 사직실내체육관에서 열린 경기에선 유력한 우승 후보였던 징동을 3 대 1로 압도했는데 그 중심엔 7년 전의 전성기를 연상케 하는 이상혁의 플레이가 있었다.



K게이머의 '선한 영향력'



롤은 온라인에서 5인이 팀을 이뤄 팀 대 팀으로 경쟁하는 게임이다. 이 때문에 늘 악성 이용자(트롤)의 문제가 끊이지 않는다. 롤 e스포츠 팬덤 역시 다른 프로 스포츠 종목의 팬덤처럼 응원 팀이 패했을 때 '범인 찾기'를 하거나 상대 팀 선수를 조롱하고 비난하는 등 과격한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번 롤드컵 결승을 앞두고는 좋은 경기를 하는 상대 팀을 존중하고 설령 지더라도 잘 싸웠다고 응원하겠다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온라인에선 팬들이 결승을 앞두고 마음을 가다듬는다는 뜻으로 "목욕 재계를 하고 경기를 보겠다"거나 "길거리에서 쓰레기를 주웠다"며 선행을 '인증'하는 표현도 유행 중이다. 일본 출신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 선수인 오타니 쇼헤이가 "남이 버린 행운을 줍는다"는 의미로 늘상 쓰레기를 줍는다는 데서 비롯한 유행인데 T1의 우승을 기원하고 좋은 기운을 몰아주겠다는 뜻에서 팬들이 선행에 나선 것이다.

선수도 이런 분위기를 이끌고 있다. 이상혁은 12일 4강에서 징동을 꺾은 후 사진 촬영을 하면서 트레이드마크 제스처인 '썸업(엄지를 올리기·따봉)'을 취했지만 이를 뒤집는 사진사의 '썸다운(엄지를 내리기)' 제스처 요청은 거절해 화제가 됐다. 그는 15일 미디어데이 행사에서 "상대방을 뛰어넘었다기보다는 좋은 경기를 해서 감사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제스처를 취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한국은 물론 세계 e스포츠 리그를 상징하는 선수이자 스타다운 태도가 팬덤으로 확산하며 귀감이 된 것이다.

인현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