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바른손이앤에이를 기억하시나요. 영화 좋아하시는 분들은 ‘기생충’(2019)의 제작사라는 점을 바로 떠올리실 듯합니다. 아시다시피 ‘기생충’은 K콘텐츠의 대명사입니다. 2020년 한국 영화 최초로 미국 아카데미상 트로피를 품었습니다. 한 개가 아닙니다. 작품상과 감독상, 각본상, 국제장편영화상을 수상하며 4관왕에 올랐습니다. 한국을 넘어 아시아에선 전례가 없는 수상 기록입니다. 영화와 드라마 기획만으로도 바쁠 만한 바른손이앤에이는 최근 단행본 출판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기생충’ 신화를 일군 이 회사는 왜 책을 내려는 걸까요. 어떤 사업과 연계돼 있는 걸까요.
바른손이앤에이가 작업 중인 책은 ‘키노 시네필’입니다. 다음 달 발행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키노라는 단어에 가슴이 설렐 영화애호가들이 적지 않을 듯합니다. 키노는 1995년 5월 창간돼 영화문화에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은 영화잡지입니다. 스타의 신변잡기보다는 감독의 작품 세계, 배우의 연기 이력 등을 깊이 있게 다뤄 당시 젊은 영화애호가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많은 영화학도들이 이 잡지를 보며 영화에 대한 꿈을 키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2003년 7월 폐간됐습니다.
‘키노 시네필’의 키노는 앞에서 언급한 잡지에서 왔습니다. 곽신애 바른손이앤에이 대표는 키노 기자로 활동했었습니다(곽 대표와 ‘기생충’ 봉준호 감독은 기자와 인터뷰 상대로 첫 인연을 맺었다고 합니다). 공교롭게도 키노 마지막 호의 숫자는 99였습니다. 잡지를 즐겨 보던 이들 사이에서 100호를 내지 못해 아쉽다는 얘기들이 꾸준히 나왔습니다. ‘키노 시네필’은 그런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만들어지는 셈입니다.
편집진을 봐도 키노와의 친연성이 눈에 띕니다. 키노의 창간 편집장이었던 정성일 영화평론가 겸 감독, 이연호 전 키노 편집장, 키노 기자 출신 장훈(‘택시운전사’의 장훈 감독과 동명이인) 감독, 키노 기자였던 이영재 교수, 곽신애 대표, 김미영 감독, 주성철 씨네플레이 편집장이 편집진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키노 시네필’에는 여러 기획이 담겨있는데요. 키노 폐간 이후 활동이 두드러진 국내외 감독들의 작품 세계를 조명하는 내용이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습니다. 박찬욱, 봉준호 감독 등 2000년대 세계 영화계를 놀라게 한 국내 감독이 포함됐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30일부터 열리는 제49회 서울독립영화제의 해외 초청 부문은 ‘키노 시네필’과 연계돼 있는데요. 이 부문 상영작들 감독은 ‘키노 시네필’이 주목하는 영화인들입니다. 서울독립영화제 해외 초청 부문에서는 팜 티엔 안 감독의 ‘노란 누에고치 껍데기 속’(2023)과 페드로 코스타 감독의 ‘비탈리나 바렐라’(2019),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2023), 왕빙 감독의 ‘청춘(봄)’(2023) 등 7편이 국내 최초로 상영됩니다.
곽신애 대표가 키노 출신이라서 바른손이앤에이가 ‘키노 시네필’을 출간하는 걸까요. 어느 정도 맞다고 할 수 있으나 꼭 그렇게만 볼 수는 없습니다. ‘키노 시네필’은 바른손이앤에이 신사업과 관련이 있습니다.
바른손이앤에이는 지난 6월 블록체인 전문기업 람다256과 함께 MMZ라는 영화온라인커뮤니티를 만들었습니다. MMZ는 영화를 좀 더 깊이, 넓게 즐기고 싶은 애호가들 위한 공간을 자처하고 있습니다. ‘키노 시네필’은 MMZ 사업 활성화를 위해 기획됐습니다. MMZ 이용자들 중 키노의 추억을 잊지 못하는 이들이 많으니까요.
MMZ는 ‘알파 멤버십’이라 불리는 유료회원과 무료회원으로 나뉘어 운영되고 있습니다. 유료회원은 가입할 때 5만5,000원을 내야 합니다. 유료회원은 1,895명으로 한정돼 있습니다. 프랑스에서 뤼미에르 형제가 영화를 탄생시킨 해인 1895년에서 착안한 숫자입니다. 무료회원 수는 제한이 없는데, 벌써 네 자리 숫자를 기록하고 있다고 합니다.
유료회원은 여러 혜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키노 시네필’ 같은 MMZ 제작 상품 구매를 예약하면 할인을 받을 수 있고, MMZ가 주최하는 오프라인 파티에 초청되기도 합니다. 바른손이앤에이의 넓은 영화계 네트워크를 감안하면 파티에 관심이 쏠릴 만도 합니다. MMZ는 앞으로 여러 소규모 모임을 만들 계획이 있기도 합니다. MMZ는 '트레바리'(독서모임 커뮤니티 서비스)의 영화판 버전인 셈입니다.
바른손이앤에이가 MMZ 사업에 착수한 이유는 건전한 영화문화 형성과 확산입니다. MMZ가 큰돈이 될 사업은 아니나 올바른 관객 참여 문화가 만들어지면 결국 좋은 콘텐츠 제작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판단에서입니다.
지난해부터 영화계에서는 ‘역바이럴 마케팅’이라는 말이 크게 나돌고 있습니다. ‘역바이럴 마케팅’은 경쟁작에 대한 험담을 온라인에 의도적으로 크게 퍼트려 자기네 영화의 흥행을 도모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당장은 경쟁작의 기세를 누를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영화계 전체에 대한 혐오를 확산시킬 우려도 있습니다. 악순환의 덫에 빠지는 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과연 바른손이앤에이는 ‘기생충’ 신화를 썼듯 영화에 대한 악플이 넘쳐나고 주목받는 온라인 문화를 MMZ를 통해 바꿀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