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없다. 한때 스포츠강국으로 굴림했던 한국은 프로리그가 있는 배구, 농구 등 구기 종목조차 엔트리를 채울 유소년 선수를 모으지 못하고 있다. 운동을 택한 아이들은 퇴로를 차단한 채 운동에만 모든 것을 건다. 반면, 운동부 밖의 평범한 아이들은 입시 교육에 매몰돼 운동을 사치로 여긴다.
한국일보가 'K 스포츠의 추락, J 스포츠의 비상' 시리즈를 취재하며 2개월 동안 현장에서 만난 전문가들은 "이제는 극약 처방이 필요한 때"라며 절박한 심정을 토로했다. 모든 아이들이 쉽게 운동을 접할 수 있도록 생활 체육 환경을 조성하고, 이 가운데 특출난 학생이 전문 선수가 될 수 있는 선진국형 구조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의 스포츠 작가인 오시마 히로시(62)는 "일본을 비롯한 대부분의 나라가 도입한 시스템을 한국처럼 저력 있는 국가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현장 전문가 등의 제안을 토대로 한국 스포츠의 재도약을 위한 '5가지 처방'을 제시한다.
우선 입시 부담에서 자유로운 초등학생들이 부담없이 스포츠를 접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줘야 한다. 저출산 시대에 무너진 유소년 스포츠의 저변을 넓히고, 재능 있는 선수를 발굴하려면 필수적이다. 국내 교육 시스템에서 그나마 학업에 목매지 않아도 되는 시기는 초등학교 때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에서만이라도 기존 운동부 시스템의 '혁신적 파괴'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지금은 아이에게 농구를 시키고 싶은 부모가 있어도 ①초교 엘리트 농구부에 보내거나 ②농구교실 등 사설 클럽에 보내는 선택지밖에 없다. ①은 운동선수를 목표로 하기에 심리적 부담이 있고 ②는 돈이 많이 든다는 단점이 있다.
조금씩 확산되는 공공 클럽 시스템이 대안이 될 수 있다. '광주 방림 농구클럽'이 좋은 사례다. 농구 명문이었던 광주 방림초등학교는 부원 모집에 어려움을 겪다가 올해 3월 클럽으로 전환했다. 농구에만 '올인'하지 않아도 되는 시스템인데다 교육청의 재정 지원을 받기에 부모들은 비용 부담도 없다. 덕분에 3명뿐이던 부원이 23명까지 늘었다.
학교 체육 수업을 늘려 더 많은 아이들이 운동에 흥미를 붙이게 할 필요도 있다. 정현우 한국스포츠정책과학원(KISS) 연구위원은 "초등학교 저학년(1, 2학년) 교육과정에는 정규 체육수업이 없는데 이들에게도 체육 활동이 필요하다"며 "어릴 때부터 친구들과 어울리며 자연스럽게 몸을 부딪혀보는 경험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일본처럼 학생들에게 '1인 1기'를 익히도록 하자는 주장도 있다. 모든 학생이 한 가지 운동을 배워 평생 즐길 수 있도록 하자는 얘기다. 운동을 즐기는 학생이 늘면 이들이 꼭 선수가 되지 않더라도 향후 스포츠 시장의 소비자가 될 가능성이 높아져 산업 규모도 커질 수 있다. 강제하긴 어렵겠지만, 교육 당국이 의지만 가지면 학교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권장해볼 수 있다.
'공부하는 학생 선수' 모델도 조금 더 현실화할 필요가 있다. 중·고교 때 운동을 전문적으로 할 학생들도 공부를 병행하도록 해 경로를 이탈했을 때 다른 진로 선택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정부와 체육계도 지난 몇 년간 이런 노력을 해왔다.
하지만 학생 선수들이 따야 할 최소 점수(최저 학력제·고교생 기준 학년 평균의 30%)를 달성 못하면 경기 출전을 제한할뿐 체계적 도움은 주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유소년 체육계에선 "기초 학력이 부실한 아이들에게 '알아서 공부해 점수를 따야 대회에 나갈 수 있다'고 주문하는 건 엄청난 공포"라는 얘기가 나온다.
해외의 맞춤형 지원 사례를 참고할 필요도 있다. 농구 국가대표 출신 유망주 여준석(21)이 다니는 미국 곤자가대는 농구 선수가 대회로 수업을 빠지게 되면 근로 장학생이 선수 개개인에게 과외를 해주는 식으로 수업 결손을 최소화한다. 일본 야구 슈퍼스타 오타니 쇼헤이(29)가 졸업한 하나마키히가시 고교는 야구부원을 같은 학급에 편성해 대회 출전 등으로 수업을 빠지면 효율적으로 보충 수업을 진행한다. 이 때문에 학생 선수들은 운동을 하면서도 학업 진도를 따라갈 수 있다.
국가대표 경력 또는 전국대회 상위 성적 등으로 결정되는 체육특기자 전형을 뜯어고치자는 의견도 있다. 김양례 한국체육정책학회 부회장은 "체육특기자 입시에 학업 성적을 더 반영하면 자연스럽게 학생 선수들도 공부를 할 것"이라며 "대학 수학능력시험이나 내신 등 학업 성적 반영 비율을 단계적으로 올려야 한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올해 학업 성적을 5% 반영했다면 이듬해부터는 10~15%로 올려가자는 얘기다.
운동할 마음이 있어도 시설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한계가 있다. 동네 체육 인프라를 늘려야 하는 이유다. 다만, 새 시설을 짓는데는 돈과 시간이 드는 만큼 일단 지금 있는 학교 체육시설부터 적극적으로 개방해 활용하자는 의견이 많다.
현행법에 따르면 학교 운동장 등 체육 시설은 학교장 재량으로 개방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지난해 체육관을 보유하고도 단 한 번도 열지 않은 학교는 32.3%(2,466개)에 달했다. 학교장 입장에선 교문을 열면 시설 관리에 어려움을 겪고, 사고라도 나면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체육 시설 개방 여부를 학교장이나 학교 평가 때 반영하는 방식으로 교문을 열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다.
다만, 교원들의 업무가 늘어난다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송애정 한국스포츠정책과학원(KISS) 연구위원은 "체육 시설을 개방하되 관리감독 업무를 학교와 지방자치단체가 분담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실제 일본 시즈오카시는 방과후나 주말에 운동장, 체육관 등을 적극 개방하는 대신 시설이나 안전 관리 책임은 지자체가 지도록 했다. 공공일자리로 학교 시설관리를 운영하거나 군대체복무자 등을 투입하면 복지사업과 병역이행 과정에서 학교시설 개방사업도 펼쳐볼 수 있다.
생활 체육 활성화를 강조하다 보면 엘리트 체육을 '악'으로 규정짓기도 한다. 하지만 엘리트 체육은 나름대로의 역할이 있다. 이종성 한양대 스포츠산업학과 교수는 "생활 체육 강화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가야 하지만 엘리트 시스템의 역할도 있다"면서 "김연아(피겨 스케이팅)와 박태환(수영) 같은 슈퍼스타가 등장해야 해당 종목에 도전해보고 싶어 하는 아이들도 늘어난다"고 말했다. 생활 체육과 엘리트 체육 간 선순환 고리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운영 방식에는 변화가 필요하다. 우선 엘리트 체육을 할 때 드는 비용을 줄여줘야 한다. 고교 축구부에서 운동을 하려면 1년에 대략 2,000만 원쯤 든다. 돈 문제 때문에 운동을 그만두는 학생도 적지 않다. 프로 구단 등 엘리트 체육이 '지갑'을 열면 활로를 찾을 수 있다.
이를 위해 프로 구단이 초중고 엘리트 운동부에 투자할 유인 시스템이 필요하다. 현재는 성적에 따라 드래프트 지명권이 임의 배분되기에 프로 구단은 연고지 유망주를 육성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지역 중·고교에 각종 지원을 쏟아 '괴물급' 신인이 배출된다고 해도 해당 구단으로 온다는 보장이 없어서다. 당연히 프로 구단들은 유소년 시스템에 형식적으로만 돈을 쓴다.
이에 프로 구단별로 연고지 고교팀 2~3곳과 연계해 지원하도록 하고 권역 유망주에 대한 1차 지명권을 갖는 제도를 도입하자는 의견도 나온다. 그래야 프로 구단이 미래를 위해 '실탄'(돈)을 뿌리며 유망주 육성에 힘을 실을 것이라는 얘기다.
운동을 학습과 무관한 것으로 인식하는 고정관념도 바꿔야 한다. 한국에선 '운동=노는 것'이라고 바라보는 시각이 강하다. 반면, 일본에서는 '운동=교육'으로 받아들인다. 일본 하나마키히가시고 고다시마 준조 교장은 "운동부 활동을 통해 인내력, 집중력을 배울 수 있다"면서 "쓰레기를 줍고, 신발을 정리하고, 올바른 자세를 배우는 등 예의범절도 익힌다"고 설명했다.
당장의 국제대회 성적이 떨어져도 새 시스템이 안착될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다. 채재성 동국대 체육교육과 교수는 "우리가 엘리트 체육 위에서 거뒀던 기적 같은 성적들은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는 모래성일뿐"이라며 "생활체육 위에 엘리트 체육이 서는 구조가 안정될 때까지 당분간 국제대회 메달에 대한 기대를 어느 정도 접는 대범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