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Lighting)이란 단어는 어둠 속에서 뭔가 비춘다는 뜻을 담고 있다. 하지만 가스(Gas)와 만나면서 의미가 달라졌다. 가스로 빛을 내는 등이라는 뜻도 여전하지만, 지금은 ‘정신 지배’라는 뜻에 더 익숙해졌다.
우리는 가스라이팅(Gaslighting)이 만연한 시대에 살고 있다. 유튜브에선 금융전문가라는 사람이 혹세무민하며 금융 가스라이팅을 한다. ‘나를 따라 투자하면 부자 된다’는 식이다. 많은 사람이 이에 속아 재산을 잃는다. 2022년 4월 미 공화당 상원 홈페이지에는 ‘미국 경제를 가스라이팅하는 바이든 대통령(Biden’s Gaslighting Us on the Economy)’이라는 제목의 논평이 올라왔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코로나19 대유행(팬데믹) 이후 경제 회복 과정의 공을 차지하며 높은 인플레이션에 대한 책임을 거부하고 있다는 비난이 골자다.
조명한다는 뜻으로 탄생한 가스등의 기원을 먼저 조망해 보자. 1790년대에 윌리엄 머독은 석탄 가스에서 비롯한 가스등을 최초로 실험했다. 그가 애초 의미의 가스등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유다. 나무에서 증류된 가스를 사용한 열 램프를 1799년 특허 완료하기까지 가스는 등과 조명의 역사에서 중심을 차지했다. 가스는 오일과 경쟁해야 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오일보다 더 쉬운 선택지가 됐다. 가스 자체가 자연적으로 인화하는 성질을 지녔기 때문이다. 많은 이는 가스 사용에 따른 잠재적이고 치명적 위험에의 노출을 두려워했지만 쉬운 발화성은 대중성으로 이어졌다. 최초의 가스 가로등은 1816년 미국 볼티모어시에 설치됐다. 1807년 영국 런던 폴 몰 거리에 이어 1820년 프랑스 파리에서 가스 조명의 대중화가 이뤄지기까지 가스 가로등의 발전은 이어졌다. 이후 가스등은 전 세계 도시의 밤을 활활 타오르게 했다.
가스 가로등은 사회를 완전히 바꾸었다. 이전에는 집 밖 나들이가 낮 시간에만 한정돼 있었다. 가스 가로등으로 여행객들이 증가했고 가게는 해가 진 이후에도 문을 열 수 있었다. 공장의 생산성이 증진하고 경제를 활력 있게 했다. 석탄 가스, 천연가스로 발전하며 20세기에 이르러 거의 모든 가정과 도시는 어떤 형태로든 가스를 주된 조명으로 사용했다. 가스 조명의 쇠락을 이끈 기폭제는 전기를 발명한 토머스 에디슨이다. 그의 전구로 가정은 낮은 110볼트(V)의 직류(DC)를 사용하게 됐다. 유리 튜브의 중앙에 필라멘트를 통해 작동하는 백열전구가 탄생한 것이다. 에디슨의 발명이 조명의 역사에 중요한 돌파구였으나 가스는 새로운 교류 전력 전송 시스템을 개발하기 전까지 여전히 중요한 지위를 점유했다.
용어와 개념은 특정 방향의 해석을 유도하는 강력한 자력(磁力)을 지닌다. 그래서 벤저민 리 워프는 언어에 대해 이런 정의를 내린다. ‘언어는 단순히 경험을 전달하는 장치가 아니라 경험을 정의하는 프레임’이라고. 그런 면에서 가스등은 가스라이팅이란 새로운 의미로 변주돼, 경제뿐만 아니라 다양한 영역에서 사용된다. 펜싱 국가대표 출신 남현희씨가 전 연인인 전청조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했다는 이야기가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다. 일천한 경력을 가진 사기꾼(전청조)이 1시간에 3억 원의 컨설팅비를 요구하는 등 재벌 3세 놀이를 하며 사람의 심리를 지배했다니 세상이 두렵다.
이런 상황을 보면 가스라이팅이 과거에 유행한 세뇌란 말과 무척 닮아 보인다. 본디 세뇌는 한국전쟁 때 중국군이 미군 포로에 공산주의 사상을 주입하기 위해 벌인 공작을 의미했다. 당시 중국군은 외부와의 격리, 심문, 징벌과 폭력, 교묘한 상벌, 교화, 죄의식 심기, 자기비판 같은 행동을 동원했다. 약물까지 사용했다는 게 미국 측 주장이다. 그렇게 세뇌당한 이들이 귀국해 살인을 저지르고 미국 정부 전복을 꾀한다. 그 모든 걸 그들을 세뇌한 ‘빨갱이’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게 1962년 영화 ‘그림자 없는 저격자(The Manchurian Candidate)’의 소재가 된다.
독일의 나치가 2차 대전에서 엄청난 학살을 자행하게 된 것을 집단 세뇌로 보는 경향도 있다. 유럽을 지배하고자 하는 아돌프 히틀러의 파시즘 권력에 교묘하게 지배와 조종을 당했기에 일어난 비극이란 얘기다. 홀로코스트(나치에 의한 유대인 학살)를 단행한 나치즘은 집단 세뇌를 연상하게 한다. 세간의 주장은 자본주의로 인해 고통을 받는 소상인과 자영업자로부터 지지를 얻을 수 있도록 경제적 반유대주의를 이용했다는 지적이다.
가스라이팅은 세뇌처럼 한쪽이 상대를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정신적 학대를 가함으로써 타인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를 일컫는 말이다. 2022년 미국 메리엄-웹스터 사전 선정 ‘올해의 단어’로 뽑혔다. 원래 미국의 극작가 패트릭 해밀턴이 써 1938년에 연출한 연극 ‘가스등’에서 유래됐다. 다만 1944년 여성심리 묘사에 탁월한 조지 큐커가 잉그리드 버그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만든 동명의 영화가 크게 성공해 이 용어가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영화에서 남편은 아내 몰래 가스등을 어둡게 켜놓고도 자신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고 말해 아내가 미쳐가도록 만든다. 정략결혼한 남편이 아내의 판단력을 흐리게 해 유산을 뺏기 위해서다. 이후 가스라이팅은 ‘가해자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상대방이 스스로를 의심하게 하는 심리적 지배’를 뜻하는 단어가 됐다. 최근에는 가스라이팅의 의미가 ‘교묘한 심리적 지배’에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하는 행위 전반’이라는 의미까지 확대됐다. 상대가 스스로의 판단을 의심하게 만드는 심리적 조종술이다.
제3자의 입장에서 보면 ‘어떻게 저런 사람에게 당했을까’ 싶은 경우가 허다하다. 전청조라는 사기범에 무려 23명이 28억 원이나 맡긴 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하지만 피해자들의 판단력, 성격, 능력만을 탓할 수는 없다. 가스라이팅이 그만큼 위력이 크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실제 가스라이팅 피해자는 처음에는 ‘내 말이 맞다’고 저항한다. 그러다 ‘어? 내가 틀린 건가?’라고 의심하게 되고, 마지막에는 ‘내가 틀린 거 같아’라고 인정하기에 이른다. ‘심리적 혼란’이 온 후 자기 잘못이라고 수용하면서 심리적 지배 단계로 넘어간다. 전청조는 51조 원이 찍힌 계좌, 모 카지노 호텔 창업자의 혼외자, 유학파라는 거짓에 국대 펜싱선수 출신 남현희의 연인이라는 타이틀을 등에 업고 피해자들을 심리적 지배 상태로 몰아넣은 것으로 보인다. 가스라이팅 피해자들은 ‘세뇌 수준’으로 빠져 피해를 당했다고 알아차리는 순간이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가스라이팅은 우리 곳곳에 산재해 있다. 부모 자식 간에도 예외는 아니다. 모든 것을 자기 멋대로 하려는 헬리콥터 부모가 있다고 하자. 그들은 사교육을 좌지우지하며 아이에게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라고 늘 아이를 윽박지른다. 흔히 그런 성격의 부모는 이런 말을 덧붙인다. “이게 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부모의 가스라이팅에 아이는 무의식적으로 지배를 당할 수밖에 없다. 어디 가정뿐이겠나. 직장에도 못된 상관이 즐비하다. 상관이 부하를 부리면서 시키는 대로 하라고 말하면 어쩔 수 없이 따르는 경우가 빈번하다. 정치와 경제에도 포퓰리즘 사고에 입각한 가스라이팅이 넘쳐난다. 약자에 대한 보조금을 과도하게 주거나 베네수엘라처럼 과도한 무상복지로 국민이 정부만 바라보게 만든다. 의료 가스라이팅도 화제가 되고 있다. 하버드 의과대학의 제리 아본 박사는 부작용이라는 용어의 가벼운 인식을 싫어한다. 부작용은 의료 약물·치료·기기로 인한 피해를 심각한 위협이 아닌 무시해도 될 불편 정도로 인식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부작용’이란 용어가 환자의 심리적 조작을 유도하는 일종의 가스라이팅이란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의료적 가스라이팅’은 의료 전문가가 환자의 증상이나 염려를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치부하거나 과도한 불안에 기인한 오판으로 인식시키는 의료적 심리 조작이다.
자본주의는 불안을 먹고 사는데 행여 우리는 교육, 의료, 금융, 일터, 경제 전반에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제대로 성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마케팅과 브랜딩은 ‘사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심리적 조종술을 기본으로 하기에 근저에는 가스라이팅이 기반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가로등처럼 어둠을 밝히는 존재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환히 뚫어 보고 조종하는 가스라이팅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심리적 무장을 제대로 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체제나 상대에게 압도당하지 않는 주체적 사고가 가장 중요하다.
조원경 UNIST 글로벌산학협력 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