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 한국 소설에서 청년 세대의 현실을 가장 리얼하게 재현하는 작가를 꼽는다면, 이제 이서수를 떠올리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젊은 근희의 행진'에 실린 열 편의 작품은 미래에 대한 그 어떤 기대나 낙관도 허용하지 않는 작금의 현실, 이른바 벗어날 수 없는 빈곤으로부터 피로해질 대로 피로해진 우리들의 평범한 삶을 극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소설의 인물들은 주거, 고용, 인간관계와 관련하여 발생한 여러 난관 앞에서 무너지면서도, 자신의 붕괴된 삶을 힘겹게 수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처럼 언제 다시 깨어나갈지 모를 취약한 삶을 낳는 근본적 원인을 작가는 ‘시대’라고 규정한다. “나는 저 여자처럼 시대가 요구하는 걸 만들고 있는 거야. (중략) 시대가 성인 웹툰을 만들어야 돈을 주겠다고 하면 그걸 만드는 거야. 그렇게 단순한 거야.”('미조의 시대')
지나치게 명쾌해서 단순해 보이기까지 한 ‘시대’라는 말에 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불평등한 ‘사회’나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저항을 여전히 꿈꿀 수 있다. 하지만 ‘시대’라는 말은 조금 다르다. 그것은 좀 더 거대하고, 벗어날 수 없는 불가역적 힘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집 전체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시대라는 단어가 계급, 세대, 사회, 현실 등의 익숙한 사회학적 용어로 대체될 수 없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이처럼 '젊은 근희의 행진'은 바로 이 시대라는 불가역적 힘에 의해 발생한 불행들, 그리고 시대라는 파고에 휩쓸려 표류하고 있는 현재의 피폐해진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중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서수가 모든 불행의 원인을 시대의 탓으로 돌리기 위해 소설을 쓴다고 결론 내려서는 안 될 것이다. 이서수 특유의 지극히 현실주의적인 시각 속에서 탐구되고 있는 것은, 거듭되는 불행이 야기하는 비관주의 속에서도 여전히 삶의 품위를 지켜낼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최근 사회학자들은 빈곤과 가난이 대중문화의 재현 공간에서 점차 사라지는 현상에 주목하고 있다. 가난과 빈곤이 사적인 수치심으로 환원되고 경제적 불평등이 철저히 은폐되는 가운데, 각종 소셜미디어에서는 자신의 행복을 전시하는 이미지들이 경쟁적으로 전시되는 중이다. 이러한 사회 문화적 인정 투쟁의 장에서 이서수의 소설은 문득 우리 자신이 잘 살고 있는지, 진정으로 행복한지를 묻는 예기치 못한 안부 인사와 같은 소설이다. 소설의 인물들이 힘겹게 보여주는 삶의 행진은, 이 불행한 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