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는 멍청해서 당하는 게 아니다

입력
2023.11.13 04:30
27면

"엄마는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거예요!"

3년 전쯤 딸을 사칭한 메시지에 속아 덜컥 모르는 계좌로 600만 원을 송금했다는 어머니에게 날 선 말을 쏟았다. 다행히 은행의 출금지연 조치로 피해는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에게 내뱉은 모진 말까진 주워 담진 못했다. 당시 부모님은 새벽부터 상경해 사람 많은 대형병원에서 수시간째 검사를 받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머니는 급전이 필요하다는 딸의 메시지를 받았다. 바쁘다는 핑계로 연락이 뜸했던 딸이었다. ‘오죽 급했으면’ 하는 마음에 확인도 않고 한달음에 모르는 이에게 입금을 했다. 뒤늦게 딸에게 연락한 뒤에야 사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화만 한 번 해봐도 되잖아요", "딱 봐도 내 말투가 아닌데, 그걸 몰라요" 등 끝없는 면박에 어머니는 자책만 했다.

그로부터 얼마 뒤 내가 그만 사기를 당했다. 오래전부터 갖고 싶던 고가의 서랍장이 중고거래 플랫폼에 값싸게 올라왔다. '누가 먼저 살까' 하는 조바심에 재빨리 사겠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판매자는 선금을 보내면 당일 배송까지 해준다고 친절하게 약속했다. 이 사실을 남편에게 공유하며 "좋은 사람 같다"고까지 했다. 새 상품을 주문하면 배송이 최소 6개월 이상 걸리는 서랍장이 퇴근 후 집에 있을 거란 생각에 마음이 한껏 들떴다. 남편의 경고보다 판매자의 재촉만 맴돌았다. 바로 송금했다. 송금과 함께 판매자와 연락이 끊겼다. 고대했던 서랍장은 구경도 못 했다. "좋은 사람 어디 갔니", "기자라는 애가 그런 데 속아 넘어가고" 등 가족의 조롱에 "서랍장이 너무 갖고 싶었고, 기사 쓰느라 따져 볼 시간은 없었다"고 자조했다.

숨기고 싶은 기억을 굳이 끄집어낸 건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전 펜싱 국가대표 남현희씨의 재혼 상대였던 전청조씨 사기 사건 때문이다. 진부한 가십 같았던 사건은 역대급 사기 사건으로 확대됐다. 전씨는 무려 23명에게 28억 원을 뜯어낸 혐의로 지난 10일 검찰에 구속 송치됐다.

전씨의 사기 피해자 중에는 평범한 사회초년생과 대학생, 직장인도 있다. 전씨는 투자 모임과 강연에서 미국 유학파 재벌 3세 행세를 하며 부와 인맥을 과시해 이들에게 거액을 뜯어냈다. 전씨의 사기 행태가 기막히지만 피해자들을 탓하는 목소리도 컸다. 'I am 신뢰에요'와 같은 엉터리 영어와 51조 원이 찍힌 말도 안 되는 계좌, 병풍 같은 경호원, '재벌 혼외자' 스토리 등 황당하고 허술한 전씨의 사기에 어떻게 속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멍청해서' 속았다는 조롱이나 허영심과 무지가 불행을 자초했다는 비난이 피해자들에게 쏟아졌다.

하지만 사기는 멍청해 당하는 게 아니다. 사기꾼은 개인의 치명적인 약점을 파고든다. 허점 없는 인간은 없기에 누구나 당할 수 있다. 지난해 국내에서 32만5,848명이 사기를 당했다. 국내 범죄 유형 중 피해자가 가장 많다. 그런데도 사기를 당하면 피해자들은 신고조차 꺼리며 위축된다. 피해자를 탓하는 환경으로 인해 자신의 약점이 노출될 수 있어 피해를 입 밖에 꺼내기도 두려워한다. 전씨의 사기 행태가 아무리 우스워도 피해자는 웃을 수 없다. '사기꾼 잡기 전문' 임채원 전 서울동부지검 검사는 자신조차 사기를 당했다고 고백하며 무겁게 경고했다. "사기는 '칼만 들지 않은 살인'이다." 살인은 조롱의 대상이 아니다.

강지원 이슈365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