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팀 킴’(컬링 여자 국가 대표팀)의 기적은 시골 동네인 경북 의성(인구 약 5만 명)에 컬링장이 생기면서 시작됐다. 개장 이듬해인 2007년, 주변에 놀 게 없어 이곳을 찾은 의성여고 4인방(김은정∙김영미∙김경애∙김선영)이 뒤늦게 컬링을 배워 세계 정상권에 진입한 것이다. ‘피겨 여제’ 김연아도 1996년 여름, 집(경기 군포) 근처인 과천시민회관 빙상장에서 처음 스케이트를 배웠다. 이 빙상장은 한 해 전에 문을 열었다.
집에서 걷거나 차를 타고 금세 갈 수 있는 생활체육시설은 엘리트 스포츠 선수 발굴을 위해 꼭 필요하다. 잠재된 재능이 있어도 운동을 접해봐야 이를 끄집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의 여건은 라이벌인 일본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
수백억 원을 들여 지은 체육공원은 이른 저녁부터 문을 닫고, 집 앞 학교들은 운동장 개방을 꺼린다. 아파트에 주로 사는 아이들에겐 편히 공을 찰 공간조차 없다. 스포츠 전문가들은 “매년 재원이 남는 지방교육특별교부금 등을 활용하면 생활체육시설을 충분히 확충할 수 있다”고 말한다. 체육관과 운동장을 주민들이 쉽게 쓸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개방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한국일보 엑설런스랩은 10월과 11월, 수도권과 지방의 체육시설을 찾아 국내 스포츠 인프라의 어두운 단면을 들여다봤다.
지난 1일, 충북 청주시 내수생활체육공원 축구장에서 공을 차던 스포츠클럽 아이들이 오후 5시 50분이 되자 허겁지겁 짐을 쌌다. 감독은 시간에 쫓기듯 아이들을 다그쳤고, 경기장 한편에서 지켜보던 학부모들도 서둘러 떠날 준비를 했다. 시침이 ‘6’을 가리키자 축구장에는 짙은 어둠이 깔렸고, 바로 앞 사물조차 식별하기 어려웠다.
불과 3년 전 문을 연 ‘477억 원짜리' 체육공원에는 조명 시설조차 없었다. 민항기와 공군기가 함께 활용하는 활주로가 2km 근처에 있어 설치하지 못한 것이다. 청주시는 “조명탑을 지어도 되는 줄 알고 2018년 착공했지만, 완공 직전 공군에서 '비행안전구역'이라 조명을 설치하면 안 된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밝혔다. 결국 축구장과 체육관, 그라운드골프장, 암벽등반장 등을 갖춘 136만 5,807㎡(41만3,156평)의 호화 체육공원은 저녁 이후엔 쓰지 못하는 반쪽 시설이 됐다.
체육공원이 주거밀집지역에서 너무 멀다는 점도 문제다. 청주 시내에서 공원에 가려면 버스를 타야 하는데 가장 가까운 정류장에서 내려도 논두렁을 따라 30분을 걸어야 한다. 인적이 뜸해 밤에는 홀로 걷기 무서울 정도다. 직장인들에게 ‘골든 타임’인 저녁 시간에는 사실상 쓸 수 없다. 이 탓에 이달 평일 기준 예약 건수는 축구장 4팀, 그라운드골프장 2팀(13일 기준)에 불과했다.
내수생활체육공원 사례는 국내 생활체육 인프라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준다. 도지사나 시장, 군수 등 지방자치단체장이 임기 중 성과를 내거나 주민 민원을 의식해 충분한 검토 없이 짓다 보니 활용도가 떨어지는 시설만 늘고 있다. 유지곤 한국스포츠정책과학원(KISS) 연구위원은 "일부 지자체에선 체육시설에 대해 이해가 부족하고, 예산이 언제 떨어질지 몰라 돈이 있을 때 서둘러 첫 삽을 뜨려고 한다”고 말했다.
지방에 위치한 공공체육시설의 가장 큰 문제는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지자체 면적을 체육시설 수로 나눠보면 차이가 확연하다. 서울은 0.19㎢당 1개 체육시설이 있는 반면, 전북은 6.25㎢, 강원은 5.99㎢당 1개를 갖고 있다. 서울시민보다 전북과 강원도민이 더 먼 거리를 이동해야 체육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장거리 이동에 부담을 느껴 운동을 시작하려다 접는 주민들이 많다. 전북 정읍시에 사는 최모(30)씨는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우리 선수들의 활약을 보고 수영을 배우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현실이 녹록지 않았다. 정읍 시내에 수영장까지는 걸어서 2시간 이상, 버스를 타도 1시간 정도 걸렸다. 최씨는 “나보다 아이들이 더 걱정”이라면서 “시내에 살지 않으면 수영을 접할 기회가 적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유소년들이 뛰는 스포츠클럽도 사정은 비슷하다. 경남 사천의 한 축구클럽 운영자는 “아파트 단지 근처에 정식 규모의 운동장이 없어 차를 타고 한참을 이동해야 한다”고 전했다.
서울과 수도권의 체육시설은 지방에 비해 많긴 하지만, 인구 밀도가 워낙 높다 보니 수요를 감당하지 못한다. 이 탓에 매월 온라인 신청을 받는 날이 되면 유명 가수의 콘서트 티켓 확보전을 방불케 한다. 회사 축구 동아리 소속인 이성훈(34)씨는 "주말이나 평일 저녁에 풋살장을 쓰고 싶어도 5분 만에 마감돼 버린다”고 하소연했다.
육상과 수영 등 기초 종목 시설은 더 부족하다. 국가대표 경기분석관인 A씨는 "(달리기를 하는) 트랙 시설도 부족하지만 원반 던지기, 멀리뛰기 등 필드 종목 훈련 공간은 더욱 찾아보기 힘들다”며 안타까워했다. 특히 실내 훈련장이 없어 겨울에는 실업팀 선수들조차 제대로 훈련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생활 체육 강국인 일본과 비교하면 우리의 열악한 현실이 더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문화체육관광부에 따르면 국내 야구장 수는 349개인데 일본은 6,616개로 19배 많다. 수영장은 7.3배(한국 492개∙일본 3,586개), 육상 경기장은 3.9배(한국 253개, 일본 1,004개) 차이가 난다.
공공시설이 부족하니 주민들은 값비싼 사설 스포츠 시설을 찾을 수밖에 없다.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학생들은 아예 운동을 포기하기도 한다. 예컨대 서울 관악구의 한 풋살장 대여료는 두 시간에 8만 원으로 서울시의 공공 풋살장(5만 원)보다 60% 비싸다.
그렇다면 인구밀집지역에 있는 학교 체육시설은 쓸 만할까. 그렇지 못하다. 문을 닫아놓은 시설이 많아 시민들이 원하는 때에 체육활동을 하기 어렵다. 초중등교육법 제11조에 따르면, 학교 시설은 학교장 결정에 따라 개방할 수 있다. 하지만 상당수 학교장들은 시설 보안과 학사일정, 관리 어려움 등을 이유로 개방을 꺼린다.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임오경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교육부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단 한 번도 주민들에게 체육관을 열어주지 않은 학교가 2,466개에 달했다. 체육관을 보유한 전체 학교의 32.3%다.
특히 저녁이 되면 학교 문을 완전히 걸어 잠가 버리니 재학생조차 시설 이용이 어렵다. 수도권의 한 중학교 배구부 감독은 “오후 6시 30분만 되면 체육관을 닫아 버려 배구부 아이들이 자율 연습조차 못한다”면서 “체육관을 저녁까지 열어놓으면 운동부 지도자가 초과 수당을 달라고 할까 봐 걱정된다는 게 이유였다”고 말했다. 반면, 일본 학교는 대부분 늦은 밤까지 체육관 문을 열어 둔다. 이 때문에 운동에 재미를 붙였거나 스스로 부족함을 느낀 학생 선수들이 자율적으로 연습할 수 있다.
본보는 지난달 31일 오후 7시부터 9시까지 저녁 시간에 서울 양천구 신월동과 목동 일대 초중고교 5곳을 돌아다니며 저녁에 운동할 수 있는 곳을 찾아봤다. 두 동네 모두 아파트가 많은 주거 지역이라 생활체육 시설을 쓰는 주민이 많다.
현실은 컴컴했다. 신남초교는 불이 다 꺼진 채 교문이 잠겨 있었고, 도보로 15분 거리인 강신중학교는 배드민턴 동호회가 쓰는 체육관만 조명이 켜져 있을 뿐 운동장을 이용할 수 없었다. 도보로 20분 거리에 있는 신서초교 역시 '출입문을 전부 폐쇄한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항저우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를 배출했다는 현수막이 걸려있던 목일중학교와 근처 신목고 역시 교문이 닫혀 있었다. 반면 신서초, 목일중, 신목고와 걸어서 15분 내외인 양천공원에는 청소년들이 늦은 시간까지 농구를 하고 있어 대비된 모습을 보였다.
특별교부금을 수십억 원씩 받아가 체육시설을 새로 짓거나 증축한 학교도 사정은 다를 바 없다. 경기 화성의 향남초는 2019년 특별교부금 21억 원을 받아 체육관을 새로 지었다. 하지만, 교직원 근무 시간인 오후 4시30분까지만 개방한다. 직장인이나 학생들이 퇴근 또는 방과후에는 이용할 수 없다는 얘기다. 6년 전 특별교부금 23억 원으로 수영장을 지은 대구 농업마이스터고 역시 수영장을 열어주지 않았다. 학교 관계자는 "다른 학교들도 빌려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주민들에게는 개방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시설 개방에 소극적인 학교들 대부분은 관리인력 부족 등 현실적 어려움을 토로했다.
학교 체육시설 수와 다양성도 일본과 비교하면 현저히 밀린다. 한국 초중고교 수영장은 164개인 반면, 일본의 학교 수영장은 2만4,800개 이상이다. 일본 학교에는 유도검도장(6,466개) 레슬링장(80개) 등 한국에서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체육시설도 적지 않다.
전문가들은 새 시설을 짓기에 앞서 기존 인프라 활용도부터 높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학교 운동장부터 개방해보자는 것이다. 다만, 학교 개방 때 발생할 수 있는 안전 문제와 시설관리, 교원들의 업무 가중 등을 막기 위한 대책도 마련돼야 한다.
지자체가 학교와 협업한다면 부작용을 최소화하면서 학교 시설을 개방할 수 있다. 공공 일자리에서 일하는 인력을 활용해 주말 학교 운동장 안전관리를 맡기거나 체육단체가 주도해 다양한 생활체육 프로그램을 만들어 학교에서 운영하면 안전 공백을 줄일 수도 있다. 올해 8월 서울시교육청과 서울 서대문·은평·성북구는 학교 시설 개방에 따른 관리비와 인력을 반씩 부담하는 사업을 시범 운영 중이다.
매년 '지방교육재정 교부금이 남아 돈다'는 지적이 있는 만큼, 이를 활용해 학교 체육시설을 꾸준히 늘리는 것도 필요하다. 서울시교육청의 경우 지난 5년간 총 31조3,785억 원의 교부금을 받았다. 같은 기간 초중고교에 총 75개 체육시설을 새로 지었는데, 투입된 예산은 85억8,906만 원에 불과하다. 교부금의 0.02%만 새로운 체육시설 건립에 쓰인 셈이다.
인프라 활용과 확충과 관련해선, 수도권과 지방의 전략이 달라야 한다는 주문도 나온다. 수도권은 체육시설을 지을 땅이 부족하기에 자투리땅을 확보하고 복합시설을 늘리는 게 핵심 과제다. 송애정 KISS 연구위원은 "유동인구가 많은 지하철역의 빈 공간을 활용해 복합시설을 짓는 등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반면 지방에선 접근성을 최대한 끌어올릴 수 있는 입지 선정과 생활체육 분야에서 활용도가 높은 시설을 집어넣는 것이 관건이다. 한국스포츠클럽 관계자는 "체육시설을 지을 때 지자체 소유의 땅을 이용하다 보니 외곽에 들어서는 경우가 많다"면서 "외곽에 덩그러니 체육관만 세우면 이용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교통망 강화 등 접근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 연구위원은 "체육시설 설립을 논의할 때부터 주민들이 참여하는 의사결정 구조를 제도적으로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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