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85년 전 유대인 학살 추모하러 모인 유대인들, '오늘의 비극'에 또 한번 울었다

입력
2023.11.11 04:30
1938년 11월 9일 '반유대주의 과격화' 부른
'포그롬' 희생자 추모 행사, 독일 전역서 개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 추모 발길도 늘어나
"하마스 제거해야 끝" "유대인 혐오 두렵다"

"반복해서 떠올려야 해요. 그래야 홀로코스트(나치 독일에 의한 유대인 학살) 비극의 반복을 막을 수 있습니다."

9일(현지시간) 독일 수도 베를린에서 열린 유대인 희생자 추모 집회에 참석한 리오가(25)는 한국일보와 만나 이렇게 말했다. 1938년 11월 9일 발생한 나치의 유대인 학살 85주기를 맞아 개최된 추모 집회였다. 당시 나치 대원 및 추종자가 독일 전역의 유대인 상점을 약탈하고 부수는 과정에서 창문이 깨졌다고 해서 11월 9일은 '깨진 유리의 밤(Kristallnacht·크리스탈나흐트)'으로 불린다. 그러나 유대인 공동체에선 조직적 약탈·학살을 뜻하는 단어인 '포그롬(Pogrom)'을 사용해 '11월 포그롬'(또는 '나치 포그롬')이라고 칭한다. 독일 정부에 따르면, 11월 포그롬 때 약 3만 명의 유대인 남성이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1,400개 이상 유대인 시설이 불탔고, 7,500곳을 웃도는 유대인 상점이 파괴됐다.

독일 곳곳에서 열린 행사에는 예년보다 많은 추모객이 몰렸다. 지난달 7일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해 민간인을 학살한 것을 보며 홀로코스트 트라우마가 되살아난 데다, 이후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무자비한 보복으로 전 세계에서 반(反)유대인 정서도 가시화했기 때문이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죽거나 생명을 위협받는 일도 늘어났다.

화염병 피습 회당에 간 숄츠 "반유대주의 용납 없다"

베를린에서는 추모 행사가 하루 종일 이어졌다. 이날 오전 베를린 유대교 회당 '베스 시온'에서 열린 추모 행사에 참석한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최근 유대인 혐오 급증 현상을 거론하며 "사회를 오염시키는 반유대주의를 우리는 어떤 곳에서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베스 시온은 지난달 18일 괴한에 의해 화염병 피습을 당했다. 독일 정부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이후 베를린에서 발생한 반유대주의 사건만 70건으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오후 유대인커뮤니티센터(이하 센터)에서 열린 추모 행사에도 인파가 몰렸다. 가디언 조페 유대인공동체 의장은 "유대인 사회 분위기가 점점 어두워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센터 앞에서는 베를린의 홀로코스트 희생자 5만5,696명 이름을 한 명 한 명씩 부르는 낭독식이 진행됐다. 센터 행사 시작 전에는 베를린 시내에서 시민들이 추모 행진을 하기도 했다. 비터펠트 광장에서 센터까지 약 2.7㎞ 구간을 약 2,000명(경찰 추산)이 1시간 30분가량 걸었다. 한국일보는 행진을 함께하며 추모객들로부터 '85년 전 11월 포그롬'과 '지금의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등에 대한 의견을 들어 봤다.

전쟁으로 스러지는 민간인들... "비극 언제 끝날까요"

참가자들은 모두 비극의 역사를 계속 상기시켜야 또 다른 비극을 막을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독일인은 '과오에 대한 책임'을 강조했다. 독일인 펠릭스(29)는 "독일 역사의 일부인 홀로코스트를 계속 반성하는 건 우리의 의무"라고 했다.

동시에 85년 전 비극을 이스라엘·하마스 전쟁과 연관 지었다. 리오가는 "모든 유대인 시설에 경찰이 배치돼 있을 정도로 독일에서 유대인은 단 한번도 안전했던 적이 없다"며 "그러나 지금까지의 폭력과 달리, (하마스와의) 전쟁 발발 이후엔 '유대인을 공격해도 된다'는 생각이 반유대주의자 사이에서 용인되는 것 같아 두렵다"고 말했다. 11월 포그롬을 기점으로 나치의 반유대주의가 과격화·급진화했던 것처럼, 이번 전쟁이 유대인 혐오를 당연시하는 분위기를 만들 수 있다는 우려였다. 하마스에 붙잡힌 민간인 인질 230여 명을 떠올리며 집회에 나온 사람도 많았다. 독일인 비이아(59)는 인질 신원이 빼곡히 담긴 전단을 들어 보이며 "비극은 지금도 계속 발생 중"이라고 했다.

유대인 추모 집회인 만큼, 현재 전쟁 국면에 있어선 이스라엘 입장에 동조하는 모습이 많이 보였다. 익명을 요구한 유대인 여성(44)은 "하마스가 있는 한 폭력은 계속될 것이기에 적당한 선에서 타협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하마스 제거가 진정한 팔레스타인 해방"(독일인 모니카·50)이라는 목소리도 있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공세가 무고한 팔레스타인인 희생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 때문에 '전쟁을 이어가야 한다'고 선뜻 주장하진 못했다. 그리스인 사포(41)는 "비극이 반복돼선 안 된다는 마음은 모두 같은데, 지금 사태의 해법을 찾는 건 참 어려운 일"이라고 말했다.

베를린= 신은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