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런의 꿈

입력
2023.11.09 16:00
26면

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투수의 손을 떠난 체인지업 볼이 포물선 궤도를 그리며 비행하는 순간, 타자가 휘두른 배트는 수평의 원 궤도를 그렸다. 그리고 지름 7.23㎝ 야구공이 지름 7㎝의 배트와 충돌하면서 5.3초 동안 122m를 날아가 담장 밖에 떨어졌다. 이 홈런으로 LG트윈스는 지난 8일 0대 4로 뒤지던 경기를 역전하며 정확히 21년, 날짜로는 7,670일 만에 한국시리즈(이하 KS)에서 승리했다. KS가 프로야구 꿈의 무대라면, 홈런은 그 무대를 화려하게 하는 꽃이다. 팬들의 뇌리에 남아있는 KS 홈런들을 되돌아본다.

□ LG가 이 홈런을 21년 기다려야 했던 이유도 바로 홈런 때문이다. 2002년 11월 10일 대구 구장에서 열린 KS 6차전은 9회 말 시작 전까지 LG가 삼성라이온즈를 9대 6으로 앞서고 있었다. 하지만 KS 내내 20타수 2안타로 부진하던 이승엽이 3점 홈런을 쳐 동점을 만들고, 다음 타자 마해영이 연타석 역전 홈런을 쳤다. 삼성이 창단 후 21년을 기다려 온 첫 KS 우승이자, 2014년까지 7번 우승에 빛나는 삼성 왕조의 시작이었다.

□ 야구 최고 엔딩장면은 역시 홈런이다. 기아타이거스와 SK와이번스가 맞붙은 2009년 최종 7차전 9회 말에 터진 나지완의 끝내기 홈런은 KS 역사에 길이 남을 짜릿한 홈런이다. 지난해 KS에서도 0대 4로 뒤지던 경기를 홈런으로 뒤집는 드라마가 연출됐다. 5차전 9회 말 대타로 나선 백전노장 김강민이 3점 홈런을 쏘아 올리며, 3시간 동안 뒤지던 경기를 한순간에 뒤집었다. 이 홈런의 힘으로 SK는 통산 5번째 우승을 할 수 있었다.

□ 홈런은 경기 내내 얽히고설킨 실수와 후회들을 ‘한 방’에 담장 밖 멀리 날려버리고, 승리를 가져올 힘을 지니고 있다. 응원하는 팀이 지고 있더라도 끝까지 응원하도록 붙잡는 것도 역전 홈런의 꿈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홈런 같은 사건이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현실의 회한을 담은 흰 야구공이 저 멀리 담장 밖으로 날아가는 모습을 보러 야구장에 간다.

정영오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