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야구의 아이콘인 오타니 쇼헤이(29·LA 에인절스)가 은인으로 여기는 지도자가 있다. 그는 오타니의 인생 계획표로 알려진 ‘만다라트 차트’를 작성하도록 조언하고, 현대 야구에선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이도류(二刀流∙투수와 타자 겸업)를 선입견 없이 지지해 줬다. '오타니만 출전시키면 승리할 수 있다'는 주변의 권유에도 부상을 우려해 사욕을 버리고 제자의 어깨를 쉬게 했다. 오타니의 모교 하나마키히가시고교 야구부의 사사키 히로시(48) 감독이다.
일본에선 '인간 오타니'의 기본은 고교 시절 다져졌다고 본다. 이 때문에 그의 고교 은사인 사사키 감독은 미국 메이저리그 최우수선수(MVP) 등극 등 오타니에게 경사가 있을 때마다 일본 미디어에 둘러싸인다. 그는 현재 일본 고교 야구의 최고 스타인 사사키 린타로(18·하나마키히가시고)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린타로는 고교 3년간 140개의 홈런을 쏴 올려 종전 기록(111개)을 훌쩍 넘어섰다.
일본 야구의 현재와 미래를 모두 키워낸 사사키의 지도관은 어떨까. 한국일보는 지난달 18일 일본 동북부 이와테현의 하나마키히가시고 교정을 직접 찾아 그를 만났다. 사사키 감독은 “한국 언론과 인터뷰하는 건 처음”이라면서 자신의 철학을 솔직히 들려줬다.
사사키 감독에게 부원들을 지도할 때 가장 강조하는 게 무엇인지 물었다. 그의 대답은 '감독은 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고 알려준다는 것이다. 부원들이 각자의 인생 시나리오를 직접 쓰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세부 계획을 스스로 세우도록 독려한다는 얘기다. 사사키 감독은 “오타니를 봐라. 고교 때 시속 160㎞의 강속구를 던지겠다고 하자 주변에선 ‘미친 짓’이라고 했다"면서 "하지만 스스로 어려운 도전을 택했고, 여기에 도달하기 위한 세부 과제를 촘촘히 짠 뒤 실천했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면서 "아이들 머릿속에서 남 탓하는 생각을 없애주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자책하라는 게 아니고, 자기주도적인 문제 해결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사사키가 생각하는 감독의 본질적 역할은 인생의 멘토다. "부원이 각자 가진 막연한 꿈과 목표를 손에 잡히는 구체적 계획으로 바꿀 수 있도록 조언해 주는 게 지도자가 할 일"이라고 했다. 예컨대 오타니는 사사키 감독의 조언을 듣고 세계 최고의 야구 선수가 되려면 연도별로 어떤 세부 목표를 이뤄야 할지 계획을 짰다. '24세에 메이저리그에서 첫 노히터 게임 달성, 26세에는 월드 시리즈 우승과 결혼, 36세에는 메이저리그 통산 탈삼진 기록 경신' 등이다. 세부 목표 가운데 WBC 우승 및 MVP 등극은 올해 초 이미 달성했다.
사사키 감독은 109명의 부원 모두가 야구만 잘하는 선수로 성장하길 바라지 않는다. 그는 "우리 부원 중에는 성인 야구 선수가 아닌 다른 꿈을 꾸는 아이가 더 많다"고 했다. 예컨대 의사 등 전혀 다른 직종에 종사하고자 하는 학생들이 있다. 이들이 꿈에 한걸음이라도 가까이 다가설 수 있도록 돕는 게 감독의 몫이다. 그는 다양한 진로를 희망하는 부원들이 관련 직종 종사자를 직접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해 주기도 한다.
사사키는 감독이라면 제자들의 선수 은퇴 이후의 삶까지 고민해 줘야 한다고 믿는다. 그가 야구부원들에게 유독 학업을 강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사키 감독은 "좁은 문을 통과해 성인 야구 선수가 된다고 해도 보통 30세를 전후해 은퇴한다"면서 "100세 시대인 까닭에 은퇴 후 70년을 더 살아야 하는데 이때 필요한 건 지력(智力)"이라고 강조했다.
사사키는 야구부 감독이기 이전에 하나마키히가시고의 교사다. 이전에는 사회 과목을 가르쳤고, 지금은 스포츠 과목을 맡고 있다. 사사키와 함께 야구부 운영을 책임진 사수가 히로유키 야구부장도 사회 교사다. 두 사람 모두 고등학교와 대학 때 야구 부카츠(部活·부활동) 경험이 있을 뿐 직업 야구 선수는 아니었다. 프로 출신 등 외부 지도자를 영입해 계약직으로 고용하고 실적에 책임을 지게 하는 우리와는 달리 일본에선 정규직 교사가 대부분 코몬(顧問·감독역)을 맡는다. 일본 운동부 감독들이 부원 개개인의 인생을 염두에 두고 지도하는 건 이런 시스템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사사키는 유독 책읽기를 강조하는 지도자다. 오타니도 사사키의 권유로 고교 시절부터 책을 많이 읽었고, 최근에는 구리야마 히데키 일본 WBC 대표팀 감독에게 추천받은 '논어와 주판'을 읽었다.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인 기업가 시부사와 에이치의 책이다.
야구를 잘하기 위해 선수가 꼭 책을 많이 읽어야 할까. 사사키 감독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독서가 운동 성과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그는 독서를 두고 "1,500엔(약 1만3,000원)에 한 사람이 평생 배운 점을 간단히 얻는 행위"라고 했다. 예컨대 독서를 통해 남의 실패담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실패에 대처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는 게 사사키의 설명이다. 그는 "나도 책을 읽고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기에 부원들에게 독서를 권하는 것"이라고 했다. 대학교 1학년 때 야구를 못해 기숙사에서 쫓겨난 적이 있는데, 그때 홧김에 나폴레언 힐의 '사고는 현실이 된다'(국내에선 '놓치고 싶지 않은 나의 꿈 나의 인생'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를 읽고 꿈과 목표를 세우는 법을 배웠다.
사사키 감독은 고교 시절을 "인생에 있어 활주로에 들어선 시기"라고 설명했다. 그는 "누구도 활주로 진입 자체를 목표로 삼지는 않는다. 여기에서 할 일은 좋은 몸상태를 유지하며, 어느 목표 지점으로 날아갈지 정하는 것"이라면서 "학교는 아이들이 목적지를 향해 잘 날아오를 수 있도록 추진력을 키워주는 역할을 하면 된다"고 말했다.
사사키 감독이 승리를 따내기 위해 선수들을 무리시키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부원들의 성장 상태를 수시로 확인하며 훈련량과 시합 출전 여부를 정한다. 오타니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부상을 우려해 중요한 지역대회에 오타니의 출전을 포기시키면서 "오타니는 우리 학교의 승리만을 위해 존재하는 아이가 아니다. 그에겐 그의 인생이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야구부원이 100명이 넘다 보니 감독으로서 고민도 많다. 고시엔 등 주요 대회에는 보통 18명가량의 선수만 출전할 수 있기에, 부원 대부분은 지원군 역할을 해야 한다. 사사키 감독은 "고시엔에 출전하는 건 그저 자랑거리에 불과하다. 남이 하는 말 가운데 가장 듣기 귀찮은 게 자랑을 늘어놓는 것"이라며 "지원군으로 남은 아이들도 3학년이 되면 각자의 목표를 향해 열심히 뛰면 된다"고 말했다.
최근 일본 야구계에서는 사사키 감독의 아들인 린타로의 선택도 화젯거리다. 사람들은 '고교 홈런왕'인 린타로가 일본에 남아 프로야구 드래프트에서 1순위 지명을 받거나 메이저리그에 도전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그는 미국 대학 진학이라는 전혀 다른 선택을 했다. 사사키는 이에 대해 "프로야구 진출은 곧 '지옥행'이라는 얘기가 있다. 모든 걸 내려놓고 오롯이 야구에만 다 걸어도 성공할 수 있을지 확신하기 어렵다"고 했다. 이어 "아들이 미국 대학에 진학하기로 한 건 가능성을 최대한 넓히는 선택이었다"면서 "미국 야구에서 실패하더라도 최소한 영어를 익힐 수 있고, 우수한 대학에서 공부한 기억이 머리에 남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여러 미국 대학들로부터 '러브콜'을 받는다는 린타로는 공부와 야구를 모두 잘하는 대학을 선택할 계획이다.
그는 인터뷰가 끝날 쯤 기자에게 '한국의 학교 체육에서 가장 큰 이슈는 무엇이냐'고 물었다. "운동선수들이 학업을 어느 수준까지 병행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다"고 답하자, 그는 단호히 대답했다.
※한국일보 엑설런스랩은 탄탄한 저변을 바탕으로 도약하는 일본 스포츠의 저력을 취재해 위기에 빠진 한국 스포츠가 가야 할 길을 찾아보는 'K스포츠의 추락, J스포츠의 비상' 시리즈를 오는 13일부터 보도합니다.
※<제보받습니다> 학교 체육이나 성인 엘리트 체육 현장에서 발생하는 각종 부조리(지도자의 뒷돈 요구, 대학·성인팀 진학·진출 시 부당한 요구 및 압력 행사, 운동부 내 구타 등 가혹행위, 학업을 가로막는 관행이나 분위기, 스포츠 예산의 방만한 집행, 체육시설의 미개방 등)를 찾아 집중 보도할 예정입니다. 직접 경험했거나 사례를 직·간접적으로 목격했다면 제보(dynamic@hankookilbo.com) 부탁드립니다. 제보한 내용은 철저히 익명과 비밀에 부쳐집니다. 끝까지 취재해 보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