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산 가리비 한번 맛보세요.”
지난달 4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의 한 대형 마트. 미야시타 이치로 일본 농림수산성 장관이 일본산 가리비를 젓가락 가득 들어올린 뒤 지나가는 말레이시아인 쇼핑객에게 내밀었다. 바로 옆에선 말레이시아 유명 모델 앰버 치아가 “일본 수산물은 안전하고 맛도 좋다”고 거들었다. 미야시타 장관은 같은 날 모하마드 사부 말레이시아 농림축산식품안보부 장관을 비롯한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10개 회원국 농림부 장관들과 만나 “일본 해산물은 안전하다”고 재차 강조했다.
요즘 동남아시아 각국에선 ‘일본산 수산물 홍보전’이 이어진다. 미야시타 장관처럼 일본 정부 관계자들이 말레이시아, 태국, 싱가포르 등을 잇따라 찾으며 자국 해산물 ‘먹방’을 펼친다. 일본 정부는 조만간 동남아를 비롯한 해외 각국에서 해산물 식품 박람회와 전시회도 열 예정이다.
이는 중국과의 관계 악화 때문이다. 그간 중국은 일본산 수산물의 최대 고객이었다. 지난해 가리비, 참치, 성게, 다랑어, 해삼 등 중국이 사들인 일본 해산물은 871억 엔(약 7,930억 원) 규모에 달한다. 특히 가리비는 10만 톤 이상 중국으로 향했다.
그러나 중국이 8월 24일 일본의 후쿠시마 제1 원전 오염수 해양 방류에 반발해 일본산 수산물 수입을 전면 중단하면서 갑자기 수출길이 막혔다. 일본 농림수산성이 지난달 발표한 ‘2023년 8월 농림수산물·식품 수출액 국가별·지역별 현황’을 보면, 중국으로의 수산물 수출액은 6월 86억 엔(약 745억 원)에서 8월 36억 엔(약 313억 원)으로 뚝 떨어졌다. 같은 기간 홍콩으로의 수출액 역시 134억 엔(약 1,165억 원)에서 69억 엔(약 600억 원)으로 반 토막 났다.
이러한 분위기는 중국 측이 공개한 자료에서도 드러난다. 중국 세관 당국인 해관총서에 따르면, 8월 중국의 일본 수산물 수입액은 전년 동월 대비 67.6% 줄어든 1억4,902위안(약 271억 원)으로 나타났다. 9월 무역통계 자료에는 일본산 수산물 수입액 수치가 기록조차 되지 않았다.
판로가 끊긴 가리비가 홋카이도 냉동 창고에 8m 높이 천장까지 가득 쌓였다는 일본 매체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결국 중국의 금수 조치로 타격을 입은 일본 정부가 손실 회복을 위해 동남아로 눈을 돌리고 있다는 얘기다.
살아있는 수산물뿐만이 아니다. 그간 ‘일본산 가리비 수입→중국 허베이성·산둥성 등에서 재가공→서방 국가로 수출’이라는 경로를 밟았던 중국 수산업자들도 가공 거점을 동남아로 옮기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손질해야 할 가리비가 아예 중국 땅을 밟지 못해 공장 운영에 애를 먹으면서 우회로로 동남아를 점찍은 셈이다.
유력한 후보지는 태국과 베트남이다. 수천 톤가량의 일본산 가리비를 취급해 온 한 중국 업자는 일본 홋카이도신문에 “오랜 기간 축적해 온 가공 노하우도 있고, 미국처럼 제품을 대량으로 사 줄 판매처도 있다”며 “현재 태국과 베트남의 가공업자들과 위탁 계약 절차를 진행하고 있는데 연내에는 (가동을)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산 가리비 주요 수입국이 중국에서 동남아로 바뀔 것이라는 의미다.
일본산 수산물을 바라보는 아세안의 반응은 ‘걱정 반, 무관심 반’이다. 공개적인 반대 움직임은 크지 않다. 시민단체조차 “오염된 수산물의 부작용이 즉각 나타나진 않지만 장기적으로 건강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검사 조치를 강화해 달라”(태국·말레이시아 소비자협의회)고만 요구하는 정도다. 일본의 오염수 방류 계획이 구체화한 뒤, 한국 시민사회에서 거센 반발이 잇따랐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일부 시민은 개인적 불안감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호소하거나 ‘자발적 불매’에 나선다. 4일 베트남 하노이 외곽의 한 일본계 대형 마트 수산물 코너에서 만난 주부 후엔은 생선 원산지를 꼼꼼히 읽어보고 있었다. 그는 “그동안 굴은 일본산을 선호했는데 이젠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굴이 물을 여과하고 독성을 흡수하는 성질이 있으니 아이에게 먹이기 더 불안하다”고 말했다.
싱가포르 스트레이트타임스(ST)에 따르면 말레이시아 북서부 관광도시 페낭의 경우, 해산물 식당들 매출이 지난 8월 일본의 오염수 방류 전후로 20%가량 줄었다. 일부 음식점은 아예 일본산 생선류 수입을 중단하기도 했다.
그러나 상당수는 오염수 논란을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페낭 수산물 시장에서 일하는 압둘 무탈리브 압둘 와합은 ST에 “외국인이 찾는 식당은 주문량이 감소했을 수 있지만, 대부분의 주민은 일본 상황에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하노이의 수입 수산물 소매업체 대표는 “일본산 수산물 수입에 대한 명확한 정부 지침이 없어 고민이 많으나 우리 업체는 당분간 수입을 이어가기로 했다”며 “가리비, 문어는 일본산이 가장 인기가 높고 대체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언론 보도도 많지 않다. 8월 27일 말레이시아 셀랑고르에서 열린 일본 오염수 방류 규탄 집회는 신화통신이나 인민망 등 중국 매체들만 대대적으로 다뤘다. 말레이시아 언론에는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동남아 각국 정부는 “위험 여부가 있는지 매의 눈으로 검사하겠다”고 입을 모은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일본산 수산물에 대해 4단계 검사 실시와 샘플링을 의무화했고, 태국은 샘플 테스트 수량을 평소보다 2배 늘리기로 했다. 싱가포르, 캄보디아 등 바다와 인접한 국가들도 일본의 오염수 해상 방류 이후 모니터링 강화를 약속했다.
두 달이 지난 지금까지 특별히 수입에 제한을 둔 국가는 없다. 싱가포르 식품청은 “일본의 방류 행위가 싱가포르 해역이나 주변 해수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낮다고 본다”며 “아직까진 오염된 (해산물) 샘플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발표했다. 캄보디아 상무부도 “해양 생태계 손상이나 인간 건강에 위협이 된다는 과학적 증거가 없는 만큼, 일본산 수산물 수입 제한을 내놓을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지난 8월 일본의 대(對)싱가포르와 대태국 수산물 수출액은 2개월 전보다 소폭(각각 1억, 2억 엔) 상승하기도 했다.
앞서 동남아 국가들은 일본의 오염수 해양 방류를 한 달 앞둔 지난 7월 열린 아세안 정상회의 당시에도 문제 제기는 커녕, 해당 이슈를 테이블 위에 올리지도 않았다.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가 해류 흐름상 오염수가 가장 빨리 도착하는 권역인 점을 감안하면 다소 의아한 대목이다. 회의가 막바지에 이를 때까지 오염수 문제가 거론되지 않자,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외무장관이 “역내 국가와 국민에게 피해를 끼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며 먼저 이야기를 꺼내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다.
일각에선 아세안의 이 같은 침묵 배경에 일본의 ‘자금력’이 있다고 본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협력을 통해 동남아 각국의 재건을 지원했다. 1999년부터 2019년까지는 정부 공적개발원조(ODA) 지출 총액의 15%를 아세안 지역에 집중시켰다. 2016~2020년 일본의 아세안 지역 누적 투자 점유율은 19%로 주요국 가운데 가장 높았다.
캄보디아 매체 캄보디아니스는 정부의 일본산 수산물 수입 결정 소식을 전하며 “지난해 3월까지 일본은 캄보디아에 15억8,000만 달러의 무상원조와 15억6,000만 달러 규모 차관을 제공했다”고 덧붙였다. 말레이시아 일간 더스타도 안와르 이브라힘 총리가 5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만나 “오염수가 안전하다는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보고서에 만족한다”고 발언한 사실을 보도하며 “올해 일본의 말레이시아에 대한 외국인 직접 투자 약속은 300억 링깃(약 8조3,800억 원)을 초과했다”고 설명했다.
7일 한국일보가 한 말레이시아 언론인에게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와 일본 수산물 수입 문제가 걱정되지 않느냐”고 묻자 다음과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2010년대 후반부터 한국과 중국의 힘이 커지긴 했지만, 여전히 아세안 지역에선 일본의 경제적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 도로, 다리 등 인프라부터 금융시장까지 일본 자금이 곳곳에 포진해 있는데 어떻게 대놓고 ‘당신의 수산물을 못 믿겠다’고 하겠느냐. 결국 돈을 앞세운 일본 ‘해산물 외교’의 승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