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지혁의 장편소설 '중급 한국어'의 첫 번째 소제목은 ’자서전’이다. 그다음은 ‘글쓰기의 과정과 기술’이고 마지막은 ’작품집 만들기’로 끝난다. 소설 속에 창작을 위한 강의노트가 들어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 소설의 시작에는 글쓰기 외에 두 가지 사건이 더 일어난다. 난임부부가 아이를 갖기로 결심한 일과 뉴욕에서 초급 한국어를 가르치던 화자가 한국으로 돌아오는 일. 그 일들은 딸을 낳아 키우는 일상과 이른바 ‘등단 작가’가 되기 위한 모색으로 이어진다. 그 결과 이 소설은 흥미롭고 유익한 강의노트이자 ’에피파니’와 난감함이 교차하는 육아일기, 그리고 작가로서의 실사판 ’체험수기’가 된다. 게다가 이 모두가 자전적인 설정인 데다 지성을 통과한 위트로 가공돼 있어 공감과 재미를 더한다.
하지만 이 소설의 진정한 재미는 화자가 공들여 구축해가는 그 세 가지 세계의 정체성에 있는 게 아니다. 그것들이 무너지고 전도되는 데에 있다. 가령 이런 순간. 진지한 줌 수업에서 학생들은 어두운 화면 너머 조용하기만 하다가 아이가 울면서 나타나 수업을 방해하자 불꽃놀이를 벌이듯 환호하며 존재를 드러낸다. 거기에 진짜 창작의 순간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의 중심부에 배치된 소제목은 더 이상 가공적 글쓰기가 아니라 유년, 사랑, 일상, 죽음과 애도, 고통처럼 삶을 정면에서 직관하는 명제들이다.
그것들에 접근하는 작가의 방식은 일종의 정직한 현 위치 찾기이다. 고통과 슬픔의 명백한 명암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며 재미있는 순간 정직하게도 볼륨을 줄여버림으로써 신뢰를 확보한다. 방향성을 갖고 있되 내려다보지 않고, 스스로 강의노트에서 벗어남으로써 끝내는 가르치지도 않는다. 학생들, 어린 딸, 가족들, 자신의 강연에 반대 의견을 말하는 청중까지도 똑같은 발언권을 갖는데 물론 스스로 ‘애매하다’고 진단한 바 있는 자신의 자리도 있다. 이처럼 점, 선, 면, 공간으로 이어지고 확장되면서도 한편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세계란 화자의 표현대로 ’동일하면서 동시에 고유한’ 햇빛에 가닿는 단계일까.
이 책은 작가의 딸, ‘나의 첫 외국어, 채윤에게’ 바쳐진다. 외국어는 예술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예술은 거기 담긴 시간을 해독하는 일입니다. 요약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빠르게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길을 걷다가 주저앉아 버리는 것입니다.” 만약 이 책을 읽으며 몇 번이고 기꺼이 주저앉았다면, 이 책 속 강의 노트를 응용해 말해보자면, 체호프 식 ‘첫 생의 체험’을 폴 오스터의 충고대로 천천히 읽은 덕분이다. 문학을 통해서만 보여줄 수 있는 수행과 배신의 이중서사 앞에서 무릎 따위는 꺾이게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