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의 전쟁 한 달째, 핵심 전장인 가자지구는 그야말로 초토화가 됐다. 최대 비극은 역시 1만 명 넘게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이지만, 생존 주민들도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겪고 있다. 가자지구 주민 10명 중 7명이 피란민 신세가 됐기 때문이다.
안전을 위해 집을 떠났지만, 마땅히 갈 곳은 없다. 유일한 탈출로인 라파 국경은 지금도 굳게 잠겨 있고, 난민이 몰린 남부 도시는 물자 부족과 인구 과밀에 신음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가자지구 주민 수십만 명을 이집트 사막의 난민촌으로 이주시키기 위해 물밑 작업을 벌이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는 사실상 강제 추방에 가깝다. 전쟁이 끝난다 해도 ‘난민 문제’가 팔레스타인의 또 다른 시한폭탄으로 떠오를 수 있다는 얘기다.
5일(현지시간) 유엔 팔레스타인난민구호기구(UNRWA)에 따르면, 가자지구 주민 230만 명의 약 70%인 150만 명이 현재 거처를 떠나 피란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됐다. 이 중 절반가량(약 71만 명)이 UNRWA 대피소에 머물고 있다. 하지만 가자지구 전역의 대피소 149곳 중 48곳(약 30%)이 이스라엘의 포격 등에 손상된 상태여서 안전을 장담할 순 없다.
가자 주민들은 말 그대로 ‘오도 가도’ 못하는 처지다. 이스라엘방위군(IDF)이 지정한 ‘인도주의적 대피로’에도 폭격이 쏟아진다. 이집트와 접경한 라파 국경은 다른 나라 국적을 보유한 외국인, 이중국적자만 통과할 수 있다. 그마저도 지난 3일 중상자들을 태운 구급차 행렬에 대한 IDF의 조준 타격에 분노한 하마스에 의해 대피가 무기한 중단됐다.
지금까지 북부에서 내려온 피란민 100만 명 이상을 떠안은 가자 남부는 물자 부족에 허덕인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남부 칸유니스에서 하루 수천 명이 빵 한 덩어리와 물 한 잔을 받기 위해 줄을 선다고 보도했다. UNRWA에 매일 빵 10만 개를 납품하는 빵집 직원 아흐메드 루스톰은 FT에 “밤새 구워도 2시간 안에 다 소진된다”며 “전날 밤부터 가게 앞에서 줄을 서는 이들도 있다”고 전했다.
일상이 파괴되고 한순간에 노숙 생활을 하게 된 난민들의 우울감도 크다. 북부 가자시티에서 그래픽디자이너로 일하던 평범한 가장 모하메드 엘리안은 AP통신에 “어디서 자고, 아이들 음식을 구할지 큰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나마 이곳(칸유니스)은 텐트 덮개를 닫을 수 있어 한결 낫다”며 “집에 언제 돌아갈 수 있을지 생각을 안 하려 노력 중”이라고 말했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난민들을 이집트 사막으로 이주시키기 위해 ‘로비’에 나선 것으로 전해졌다. 5일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이스라엘 고위 외교관 6명을 인용해 이스라엘 정부가 가자지구 피란민들을 이집트 시나이 사막 난민촌에 대피시키는 구상을 여러 나라 정부에 비공개 제안했다고 보도했다. 이스라엘 극우파들은 인도주의적 방안이라고 주장했으나, 미국 등 다수 국가는 대규모 강제 이주를 영구적으로 가능케 하는 명목이 될 수 있다는 이유로 반대했다고 한다.
특히 이스라엘이 하마스의 테러를 구실로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인 전원을 축출하려 하는 것이라는 반발도 나온다. NYT는 “1948년 이스라엘 건국 당시 팔레스타인인 70만 명이 영토에서 쫓겨나 난민이 된 ‘나크바’(대재앙)는 국가적 트라우마”라며 “이를 다시 겪느니 차라리 전쟁터에 남겠다는 목소리도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