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얼굴은 빤히 쳐다보게 된다. 사진 속 젊은 형과 꼭 닮아서다. 한국 노동계의 전설 전태일(1948~1970) 열사의 두 살 아래 동생, 전태삼(73)씨는 “(형하고) 쌍둥이라고 (사람들이) 그랬어요”라고 말했다.
태삼씨는 국회의원으로 활동한 여동생 전순옥 전 의원에 비해 덜 알려졌지만, 반세기 넘게 형의 뜻을 이어 왔다. 청계피복노조 활동을 하다 3년간 투옥됐고, 어머니 이소선(1929~2011) 여사를 그림자처럼 보좌했다. 재단사, 행상으로 일한 그 자신이 노동자였으며, 분규가 있는 노동 현장을 찾아 함께해 왔다. “(주변에서) 대학 가라고 할 때 안 간다고 했어요. 현재, 지금의 현장이 가장 중요하다고 형하고 이야기했거든요. 저는 아직도 스무 살이에요.” 태일이 스물두 살에 분신해 사망했을 때, 태삼씨의 나이였다. 곧 전태일 열사 53주기(11월 13일)이다.
지난달 23일 서울역광장에서 만난 태삼씨는 그 일대에서 보낸 시절을 떠올렸다. ‘전태일 평전’(조영래 저)에는 가족의 첫 상경이 1954년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그는 1955년으로 기억했다. “(대구·부산을 거쳐) 55년에 서울로 왔어요. 서울역 여기, 남대문 시장, 퇴계로, 서부역, 남산에서 형하고 나하고 추억을 심지 않은 곳이 없어요. 염천교로 해서, 전부 형하고 어머니하고 우리 가족들이 살던 터거든요. 염천교 철로 옆에 판잣집이 쭉 있었어요. 그 판잣집 밑에서 노숙을 했죠. 5, 6개월을요. 가마니 깔아 놓고.”
그때의 가난과 고생에 대해 태삼씨는 “형하고 나는 고생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회고했다. “고생이 뭔지도 모르고 그냥 주어진 환경에서 열심히 형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이죠. 사람의 삶이 어땠든 간에 순수하고 천진난만했어요.”
그는 형과의 어린 시절을 세세히 기억하고 있었고, 그때를 회고하는 것을 즐거워했다. “아버지가 (의복)맞춤집을 찾아다니면서 밤낮없이 일해서 돈을 모아서 회현역 바로 그 자리에 조그마한 집을 마련했지요. 그런데 정부에서 (철거한다고) 전부 불을 질러버린 거야···. 그 불타는 광경을 목격했어요. 전부 판잣집이었죠. 동네엔 싸움이 끊어질 날이 없었어요.” 현재의 기준으로는 말도 못할 ‘고생’이었지만 그에겐 형,가족과 함께한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태삼씨의 세 살 아래 여동생 전순옥 전 의원은 박사학위를 받고 학계, 정계에서 활동했다. 태삼씨에게도 그런 길을 제안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형이 사망한 후) 나보고 공부하고 대학 가야 된다고들 했어요. 김근태 형이나 장기표, 김문수 그 외 많은 사람들이 그랬죠. 나는 ‘싫다’고 했어요.”
이유는 무엇일까. 형 태일은 재단사였고, 그는 재단보조였다. “형이 평화시장 배고픈 ‘시다들’(미싱 보조)에게 풀빵을 사주고 (판잣집이 있던) 도봉산까지 걸어갔던 때, 그 시간에 형하고 나하고 나눴던 대화가 있어요. ‘지금 현실이 중요한 것이지, 그 이후는 그 이후의 사람들이 할 일’이라고요. 형이 지키고자 했던, 평화시장 노동자들과 같이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죠.” 청계피복노조는 12·12 군사반란으로 전두환 군부 세력이 집권한 후 1980년 폐쇄됐다.
“나는 어머니하고 재판을 받았어요. 3년간 춘천교도소 독방에 있었지요. 84년도에 (교도소에서) 나온 사람들이 모여서 다시 청계노조를 복원했죠. 복원할 때까지 같이했어요. 그다음에 후배들에게 맡겼죠.”
그는 아이 셋의 아버지였고, 아들의 백일잔치도 못해 주고 교도소엘 갔었다. 아내는 분유 사 먹일 돈도 부족했다. 출소 후 생계를 위해 1993년까지 재단사로 일했으며, 청바지 회사를 몇 년 운영했으나 외환위기가 오면서 그만뒀다. 이후 전국 5일장을 돌면서 행상을 하며 꽃을 팔았다. “전국 5일장 안 간 데가 없어요.”
전태일 열사의 분신 이후 노동·민주화 운동의 대모로 활동했던 이소선 여사. 어머니를 평생 모신 사람이 태삼씨였다. 이소선 여사가 살았던 그의 창동 집은 재야인사들이 끊임없이 드나들던 ‘아지트’였다. 아내는 하루 30~100인분의 밥을 했다. 이소선 여사는 며느리에게 미안해했다.
“어머니가 나한테 이야기하는 거예요. ‘며느리가 무슨 죄가 있냐, 너하고 나하고 둘이 살자’고요. 그래서 둘이만 창신동에 나와서 살게 됐죠.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12, 13년 동안 둘이 같이 살았어요.” 이소선 여사는 직함이 50개가 넘었다. 그는 12인승 그레이스에 어머니와 일행을 태우고 어디든 함께했다.
태삼씨의 아내는 현재 네팔 이주노동자들을 돕는 선교센터의 원장이다. 한 달에 1,000~2,000명의 노동자들이 먹고 자고 쉬어가는 ‘터미널’이라고 한다. 그 시어머니에 그 며느리, 그 남편에 그 아내라고 할 만하다. 각자 바쁜 와중에 부부는 항상 서로 “고맙다”고 말한단다.
어머니를 침대 위에 모시고 그는 늘 아래에서 잤다. 자다 보면 어머니가 꼭 내려와서 아들 옆에서 잤다. ‘그날’도 옆자리를 내드렸는데 갑자기 태삼씨 위로 확 넘어지셨다. “얼굴이 자꾸 변하는 거야···.” 다급한 상황이었다. 우선 어머니 열손가락을 다 따고 119에 전화를 했다. 쓰러지신 후 병원으로 이송하기까지 딱 13분이 걸렸다. 아들은 “이제 됐다”고 생각했으나, 이소선 여사는 49일 후에 세상을 떠났다.
태삼씨는 “어머니 생전에, ‘어머니 계시는 동안에는 내가 나서지 않겠습니다’ 하고 약속을 했어요”라고 말했다. 그 말은 어머니 사후에는 직접 노동운동을 하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는 어머니 장례를 치르고 바로 쌍용차 해고 노동자 문제에 뛰어들었다. “그때부터 현장에 올인했죠. (쌍용차 해고자와 가족) 22명의 죽음이 쌓일 적에 대한문에 분향소를 만들고 영정을 지켰지요.” 경찰 감시를 받으며 노조원들과 함께 분향소를 세운 상황을 그는 자세히 설명했다.
이후에도 재능교육, 기륭전자, 한진중공업 등 노동분쟁의 현장을 찾았다. “하루에 3, 4군데씩 댕겼죠(다녔죠). 가는 현장이 7, 8군데가 되고 그래요.” 현장에서 그는 “선생님, 옆에만 있어 주세요. 우리가 싸우는 거 증인만 되어 주세요”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요즘은 노조가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노동분규 현장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시대이다. 태삼씨는 강하게 말했다. “노동 현장에 대해서 요즘 사람들은 ‘까막눈’이라고 생각해요.”
그는 노동 현장에서 잊을 수 없는 많은 장례를 겪었다. 어머니를 모시고 차를 몰아 김진숙 한진중공업 해고 노동자가 크레인 농성을 하던 곳에 갔던 때다. 이소선 여사는 외쳤다. “진숙아! 내려와, 나 너 장례식 못 해!” 그러자 김진숙씨가 외쳤다. “엄마! 나 못 내려가!” 이소선 여사는 다시 “한진중공업 정상화하라고 함께할 테니까 내려와!” 하고 외쳤다. 한진중공업은 박창수(노조위원장·의문사)·김주익(노조위원장·자결)·곽재규(노조간부·자결)의 장례를 줄줄이 치른 곳이다. 사주가 매해 50억~100억 원에 이르는 배당금을 챙겨 가는 흑자 기업이었으나 낮은 임금, 정리해고, 파업 손배소 등으로 노조를 압박해 희생이 컸다.
올해 노동절(5월 1일)에 분신한 민주노총 건설노조 간부 양회동씨의 사건도 태삼씨의 가슴을 쓰리게 한다. “노동절에 구속실질심사를 하는 그 자체가 아주 잔인한 거죠. 검사가 인간을 그저 기소하는 부속품으로 취급한 거예요. 죽음 앞에서 자기들의 권위만 생각하지요. 죽음의 의미와 뜻조차 기득권들이 권력화해 버려요. 참담하죠. 돌덩어리도 아니고, 물 한 모금 없는 사막 같은 세상을 접하고 있어요.”
진보 진영 지도자들도 좌절을 안겼다. “김대중 대통령이 비정규직을 만들었고, 정규직·비정규직 사이의 갈등과 가슴 아픈 일들이 있지요. 최근에는 노동 현장에서 문재인 정부가 잘못한 부분, 약속을 지키지 않은 부분에 대해 원망하는 이야기들도 많이 들려요.”
전태일 열사는 노동운동계의 전설이지만, 그는 형에게 개인적 불만이 많다. “대구에 만들고 있는 전태일기념관에 꼭 기록해야 할 것이 있어요. ‘형은 나쁜 형이다’라고 기록을 먼저 해야 해요. 불효자예요.”
가난했던 그의 가족은 태일 때문에 뿔뿔이 흩어진 적이 있다. 태일은 서울 남대문초등공민학교에 다니다가 다시 대구로 가서 청옥고등공민학교(중학교 과정을 가르치는 야간학교)엘 다녔다. 행복했던 청옥의 시간은 1년도 안 되어 끝이 났다. “(아버지가) ‘공부를 그만하라’고 하니까 형이 나를 데리고 열차를 타고 서울로 왔잖아요. 책 보따리 허리에 매고요. 아무리 공부를 하고 싶어도 그렇죠.” 태일이 열다섯 살, 그가 열세 살 때였다. 탑골공원 담벼락 밑 사과궤짝에서 잠을 잤다.
“열세 살 된 애가 어떻게 견디겠어요. 내가 열이 나니까, 나를 잃겠다 싶어서 다 집어던지고 다시 대구로 갔잖아요.” 또 얼마 후 아버지의 술주정과 폭력을 피해 태일은 막내 순덕을 업고 서울에 식모살이를 하러 떠난 어머니를 찾아 무작정 상경했다. “여섯 식구가 뿔뿔이 흩어지는 거예요. 형 만나면 따지고 대판 싸울 판이에요.”
사단법인 ‘전태일의 친구들’은 시민모금을 통해 대구에 전태일기념관 설립을 준비 중이다. “(대구에 살던 때의) 집터를 구입했고, 집을 복원할 예정이에요. 제가 (집 구조를) 다 그려주고 왔어요.” 집이 복원되면 그때의 삶과 풍습까지 되살릴 생각이다. 청옥학교를 다니던 때의 가장 행복했던 형의 모습을 담고 싶은 마음, “나쁜 형”을 사랑하는 동생의 마음이다.
전태일 열사의 50주기(2020년)에 약 100권의 책, 그 외 애니메이션 등이 나왔다. 그런데 태삼씨가 보기엔 틀린 사실들도 있고, 내용도 충분치 않았다.
그는 ‘1970년 11월 13일’의 의미를 사람들이 잘 모른다고 생각한다. “당시에 너무 열악한 상태에서 어린 동심들(시다 노동자)을 보호하고자 했던, 그 노동운동에만 초점을 둔 거죠. 형의 휴머니즘,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능이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는 없는 거예요.”
청옥학교에서 실장(반장)이었던 태일은 부실장 여학생을 짝사랑했고, 분신 3일 전(11월 10일) 성인이 된 그 여성을 찾아가 만났다고 한다. 그리고 ‘3일 후면 나는 죽을 수밖에 없어’라고 말했다. 태삼씨는 그 부실장을 포함해 형의 청옥학교 시절 동창들을 만나고 있다. 전태일 열사의 유서가 청옥 시절 친구들에게 쓰는 편지 형식으로 되어 있을 만큼 그 시절이 각별했기 때문이다.
태삼씨는 전태일기념관을 통해, 과거의 순수하고 천진했던 에피소드 하나하나를 되살리고 싶은 열망을 보였다. “(탑골공원 노숙 시절에) 나는 성냥, 은단을 팔러 다니고 형은 구두통을 들고 따라오는데, 구두 닦는 다른 아이들한테 잡히면 다 뺏겨요. 그래서 내가 망을 보고 가면서 신호를 보내면 형이 그걸 보고 안심하고 지나가고 했어요.” 평생 간직해 온 형과의 추억들이다.
그가 기자에게 건넨 명함은 노동운동, 과거사청산, 민주화운동에 몸담아 온 그의 이력을 대변한다. ‘국방과학연구소 노동조합/국방기술품질원 노동조합 상임고문’ 직함을 가지고 있는데, 노조가 출범하고도 여전히 ‘노조’로 인정받지 못한 지난한 과정을 설명하며 태삼씨는 답답해했다.
그는 ‘전두환심판 국민행동 상임고문’으로도 활동한다. ‘전두환 추징3법’ 제정과 할아버지의 과오를 사죄한 전두환 손자 전우원씨를 지원하고 있다. 태삼씨는 지난 3월 전우원씨를 직접 만나 격려와 위로도 했다. “사회에 갓 태어난 영혼이 맑은 청년이 서울 한복판에 서서 기자들이 물어보니까 자기 자신을 규명하고 ‘나는 죄인이다’ ‘비자금 속에서 태어났고 비자금으로 자랐다’ 하는 거예요. 우리가 받아안아야 되고 그가 설 자리, 그가 소통하고자 하는 공간을 만들어 줘야 돼요.” 태삼씨는 “‘국민 손자다, 우리가 지키고 응원하자’며 모인 사람들이 2,500명이 넘어요”라고 전했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운영위원’도 그의 직함이다.
‘언제나 현재를 살아야 한다’는 형과의 대화를 실천해 온 동생은 인터뷰를 마치고 헤어진 후, 다시 기자에게 전화해서 다하지 못한 이야기를 추가하기도 했다. 언론과 인터뷰를 한 적이 거의 없었다는 그는 말미에 뭉클한 소회를 말했다. “추억이 주마등처럼 다가왔어요. 서울역 주변에 (추억이) 다 와서 서더라고요. 형이 좋아할 것 같아요. 어머니도 좋아할 것 같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