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에 이어 열린 장애인아시안게임이 지난달 말 폐막했다. 아시안게임의 뜨거운 열기를 패러게임까지 끌고 나가 대중들의 관심이 이어졌으면 좋으련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4년마다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이 끝나면 같은 장소에서 곧바로 뒤이어 열림에도 장애인 대회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바닥이다.
아시안게임 기간 지상파 3사는 정규 편성을 미루고 경기 중계에 올인했지만 아시안 패러게임은 언제 시작했는지조차 알기 어려웠다. 기사 작성을 위해 여기저기 뒤져봐도 경기 일정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은 중국어로 된 항저우 아시안 패러게임 공식 홈페이지뿐이었다.
그러다 메달이라도 나오면 매체들은 앞다퉈 '극복' '기적' 등의 수식어를 붙여 가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들이 운동선수로 대회를 준비한 과정보다 무슨 장애를 가졌으며 어떻게 이겨냈는지 스토리에 치중했다. '극복'이라는 말 자체가 아픈 과거를 새삼 떠올려야 할 장애인들에겐 불편한 표현인 데도 말이다.
패러(para)라는 표현에는 ‘장애’뿐 아니라 그리스어 어원인 ‘가까이’와 ‘나란히’ 등 적극적인 의미가 들어 있다. 1988 서울패럴림픽은 패럴림픽이 올림픽과 ‘평행’(parallel)하게 치러지는 틀을 갖춘 전환점이 됐고, 아시안게임에서는 2010년 광저우 대회부터 패러게임이 열리고 있다. 그들이 바라는 건 영웅 대접이 아니라 편견의 배제다. 남과 조금 다른 몸을 가졌을 뿐 마음만은 누구보다 건강한 선수들의 투혼은 투혼 자체로 받아들여지는 게 옳다.
5년 전 평창 동계패럴림픽 당시 깊은 울림을 준 벨기에 패럴림픽위원의 조언이 떠오른다. “선수들을 언론에서 배트맨으로 영웅화시켜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패럴림픽 선수들을 올림픽보다 더 대단한 선수로 취급하지 말아 달라.” “언론은 장애인 선수들이 부진했다는 부분을 보도하기 부담스러워 하는데 그저 ‘원숭이도 나무 위에서 떨어질 수 있다’는 관점으로 보도하는 것이 긍정적이다.” 장애에 대한 부정적인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영웅화’는 실제론 사회 활동 참여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장애인들에 대한 편견을 심화시킬 수 있다는 지적이다.
패러스포츠가 장애인만의 경기가 아니라는 걸 이번에 증명했다. 이번 아시안 패러게임 탠덤사이클 3관왕에 오른 시각장애인 김정빈은 앞에서 방향을 잡아준 비장애인 윤중헌과 함께 페달을 밟았다. 시각장애 달리기 선수에겐 가이드 러너가, 중증 보치아 선수에겐 홈통을 조정해 줄 보조원이 필요하다. 경추장애 사격선수에게는 실탄을 장전해 주는 로더가 동행한다. 비장애인 임직원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선수들의 곁을 지키며 힘을 보탰다.
일주일간 이어진 대회에서 우리나라는 금메달 30개, 은 33개, 동 40개로 종합 4위를 차지했다. 비장애인 스포츠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의 시각에 다소 박진감이 떨어져 보일지 몰라도 선수들은 몸이 부서져라 싸웠다. 후배 기자들에게 그들이 가진 장애에 얽힌 사연을 들춰내기보다는 감동이 덜하더라도 성적 자체로, 건조하게 기사를 쓰라 권했다.
전국 장애인 체전이 지난 3일 개막했다. 비장애인 체전에 비해 관심을 끌지 못할지언정 억지 영웅을 만들 필요는 없다. 동정하지도, 과장하지도 말고 그냥 인간으로서 장애인과 장애인 선수들에게 다가가는 방법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