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B1이 아니라 '설'인데요?"... 엉터리투성이 공공기관 점자시설

입력
2023.11.04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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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97번째 '한글 점자의 날']
점자시설 미설치·오기 수두룩
표준 규격 있어도 업체는 몰라
"위원회 설치 등 책임 강화해야"

1일 오전 서울 마포구 연남동주민센터. 주민이라면 누구든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곳이지만, 시각장애인 홍서준(43)씨에겐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한 발짝 내딛기 힘든 공간이다. 민원실 앞을 오가는 사람들 사이로 이리저리 움직이던 그의 손은 결국 허공에 멈췄다. 제대로 된 점자 안내판을 찾을 수 없었던 탓이다.

4일은 97번째 ‘한글 점자의 날’이다. 한글 점자가 세상에 나온 지 거의 100년이나 됐으니 시각장애인도 맘 놓고 공공기관을 드나들 수 있겠다 싶었다. 아니었다. 점자시설이 없는 곳이 수두룩하고, 있어도 오류투성이었다. 일상과 가장 밀접하게 맞닿은 주민센터마저 그렇다.

1층에만 있는 점자... 간격도 제각각

한국일보는 시각장애인이자 시각장애인편의시설지원센터 연구원인 홍씨와 서울 소재 주민센터 3곳을 둘러봤다. 국립국어원의 '점자 편의시설 표준 지침서'를 토대로 점검한 결과는 낙제점이었다.

연남동주민센터 주출입구에는 의무 설치사항인 점자안내판이 없었다. 진입 경사로에 있던 손잡이에도, 1층 출입구 바로 앞 민원실에도 손 닿는 곳에 점자가 보이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탄 뒤 버튼을 누르던 홍씨는 고개를 갸웃했다. 버튼 점자 간격이 좁아 해독이 어려웠던 것이다. 표준 간격은 5.5~6.5㎜지만, 버튼 점자 간격은 5㎜에 불과했다. "B1(지하1층)의 영문 'B'가 한글 '설'로 잘못 읽힐 수 있어요. 점자를 오래 쓴 사람은 간신히 해독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화장실 점자도 1층에만 있었다. 2층엔 화장실과 동장실 등 장소별 안내 점자가 없었다. 계단 역시 난간만 있을 뿐 장애인을 위한 손잡이와 점자 표기는 따로 마련되지 않았다. 주민센터 관계자는 "2층 위로는 사무실이라 민원실이 있는 1층 위주로 점자시설을 설치한 걸로 알고 있다"고 해명했다.

영등포구 당산1동주민센터 역시 출입구 앞에 점자안내판을 설치하지 않았다. 민원실 안내판 점자는 간격이 4.9㎜로 규격 미달이었다. 난간에 붙은 점자 표기도 오류 범벅이었다. ①쉽게 손이 닿을 수 있는 각도(15도)도 아니고 ②올라가면 어떤 장소가 있다는 안내 없이 '올라감'이라고만 적혀있었으며 ③이마저도 점자가 적힌 방향이 읽는 방향과 달랐다.

장애인이 이용하는 데 무리가 없다는 뜻의 '배리어프리(Barrier-free)' 인증을 받은 동작구 상도4동은 대부분의 점자시설이 구비돼 있었으나, 엘리베이터의 버튼만은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점자 간격 규격을 지키지 않았다.

주민센터 35% 시각장애인 이용 어려워

2020년 국립국어원이 발표한 동주민센터의 점자 표기 실태조사를 보면, 연면적 1,000㎡ 이상 주민센터가 있는 기초지방자치단체 복지센터 203개소를 점검했더니 35.7%가 부적정 설치, 35.3%는 미설치였다. 10곳 중 3곳 이상꼴로 시각장애인이 주민센터 이용에 곤란을 겪는다는 뜻이다. 해당 연구에서 보조연구원으로 참여한 홍씨는 "3년 전이나 지금이나 바뀐 게 없어 착잡하다"며 "여전히 화장실을 못 찾을까 봐 직원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거나 업무를 마친 뒤 물어본다"고 토로했다.

3년 전 정부는 한글 점자 규정을 개정하면서 점자의 높이와 점 간 거리 등 물리적 규격을 제정했다. 그러나 제작업체가 개정 내용을 모른 채 제품을 만들면서 부적합한 점자 표기가 계속 나오고 있다. 교정사의 직접 검토가 없거나, 발주기관이 주어진 예산에 맞춰 지침에 부합하지 않는 내용 및 규격의 시설 제작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개선 현황 모니터링을 도맡는 위원회를 만들고, 시설 설치 발주 때부터 시각장애인연합회 등 전문가 검토를 의무화하는 등 보다 책임을 강화할 수 있는 대책이 필요한 이유다. 장애인 편의시설 전문가인 박병규 서울과학기술대 건축학부 명예교수는 "시설을 제대로 설치하지 않은 공공기관에는 이행강제금이 부과되지만, 시설 변경에 예산이 많이 들고 지자체가 스스로에 이행금을 내라는 격이라 실효성이 있는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서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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