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정치 담론에서 오랫동안 북한의 핵개발은 특유의 ‘벼랑 끝 전술’로 이해돼왔다. 핵개발에 필요한 시간을 벌기 위해 외교를 이용할 뿐이라는, 냉소적 시각이다. 하지만 북핵 위기를 풀기 위해서는 북한 핵개발과 외교상 ‘이중전략’(dual strategy)을 제대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을 담은 책이 나왔다. 2004~2010년 매년 방북해 7차례 핵시설을 둘러본 핵물리학자이자 핵무기 전문가인 시그프리드 헤커(80) 미국 로스알라모스 원자력연구소 명예소장이 쓴 ‘핵의 변곡점’이 그 책이다.
북한의 1차 핵실험(2006년) 이전부터 그가 북한 현지에서 확인한 것은 핵개발을 북미 양자협상의 ‘지렛대’로 삼으려는 확고한 의지였다. “그들은 망설임도 없이 그들이 만든 생성물을 보겠느냐고 물었다. '플루토늄 말씀입니까?'라고 되묻자 ‘맞습니다. 원하신다면요.’라고 했다.”
2004년 당시는 농축 우라늄 개발이 외부에 알려지고 북한의 핵확산 금지조약(NPT) 탈퇴로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가 무력화한 시점이었다. 북한은 농축 우라늄보다 핵탄두 소형화 및 수소폭탄 제조에 유리한 플루토늄 재처리 기술 확보까지 과시했던 셈이다.
그 의도는 전쟁이 아니라, 미국과 협상 테이블에 앉는 것으로 보였다. 헤커는 당시 북한 당국자들의 말을 전한다. “세계가 모호함을 좀 덜어버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 안타까운 일입니다.”(리근 당시 북한 외무성 미국국 부국장), “지금 이 보고를 당신의 정부에도 그대로 해주면 좋겠습니다. 더하지도 빼지도 말고 말입니다.”(김계관 당시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귀국한 헤커는 미 상원 해외관계위원회 비공개 청문회 등을 통해 보고 들은 바를 전했다. 하지만 결과는 기대를 빗나갔다. “당파 정치와 깊이 뿌리박힌 이데올로기 때문에 이런 관심사가 뒷전으로 밀리는 듯 보이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부시 정부 내 강경파들은 북한의 정권 교체에 미달하는 그 어떤 방식으로도 북핵 위기를 해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1990년대 초 냉전 말 정세의 대변동 속에서 김일성 전 북한 주석은 생존을 위해 미국과의 화해를 선택했으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이를 유지하고 있다고 헤커는 주장한다. 그럼에도 미국 정부는 오로지 ‘비핵화’에 초점을 두고 '외교냐, 핵개발이냐' 양자택일만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의 중간지대 소멸은 북한의 이중전략에 대한 합리적 대응이 아니라는 게 헤커의 주장이다.
미국의 선의의 외교적 노력이 북한의 거듭된 합의 위반으로 무산됐다는 통념을 뒤집는다는 점에서 논쟁적이다. 북한 탓만 하기보다는 워싱턴의 역할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게 핵위기를 완화하는 유일한 실용적 방안이라는 게 저자의 결론이다. 얼마전까지도 ‘우리민족끼리’를 내세웠던 북한의 속내는 미국과의 직접대화가 분명하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