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보다 늦게 죽는 딸이 되기 위하여

입력
2023.11.01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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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명과 생명의 이치에 따라 자식은 대개 부모보다 늦게 죽는다. 먼저 죽는 자식이 이상스럽게 늘어나는 건 세상이 망해가는 징조다. 사회시스템이 무너지고 국가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할 때 부모는 자식의 죽음을 진지하게 염려한다. 그 염려를 속절없이 현실로 바꾸는 것, 전쟁이다.

“예스, 예스!”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렇게 소리친 아버지가 있다. 겨우 여덟 살이었던 외동딸은 이스라엘을 기습한 하마스에 살해당했다. “이틀 만에 아이를 찾았는데 죽어 있었대요. 난 웃었어요. 죽은 게 차라리 나으니까요. 인질로 잡혀 갔다면 깜깜한 방에 갇혀서 몇 년을···.”

그는 기뻐한 게 아니다. 일그러진 얼굴로 신음하듯 울었다. 내가 다시는 딸을 볼 수 없어도, 아내마저 몇 년 전 세상을 떠나 홀로 남겨졌어도, 딸이 고통스럽지 않다는 것에 가슴 쓸어내리는 게 부모의 마음이다. 부모는 자식이 겪지 않은 고통에도 몸서리친다.

어느 호스피스 간호사가 쓴 글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오래 앓다 떠나는 부모를 임종하며 자식은 자신을 걱정한다. “안 돼, 엄마. 가지 마. 나는 어떻게 살라고···.” 자식을 보내면서 부모는 자식만 걱정한다. “미안하다, 아가. 좋은 곳으로 가서 아프지 말고 살아라···.” 부모의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그토록 사랑하는 자식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준비하며 절망하는 부모들이 팔레스타인에 있다. 전쟁이 시작된 지 25일 만에 가자지구에서 아이들이 3,500명 가까이 숨졌다. 그 무시무시한 숫자와 무력한 정부의 존재 앞에서 부모들은 “죽어도 너를 지키겠다”는 약속을 차마 하지 못한다. 체념한 그들은 지워지지 않는 펜으로 아이의 작은 몸에 아이의 이름을 크게 쓴다. 간지럽다고 아이는 웃고 부모는 운다.

자식을 포기해서가 아니다. 번호가 매겨진 무연고 사망자가 되어 여기저기를 떠돌다 집단 매장되는 것만은 막아 주기 위해서다. 시신을 찾아내 눈이라도 꼭 감겨 주기 위해서다. 엄마와 아빠가 여기 있다고 죽은 아이를 안심시켜 주기 위해서다. 몸통과 다리에 글자가 잔뜩 적힌 채로 흙바닥에 줄줄이 누워 있는 아이들의 시신 사진을 봤다. 아이와 부모를 조롱하는 댓글들도 봤다. 전쟁은 부모의 사랑을 비웃는다.

자식이 너무 오래 살지 않기를 차라리 바라는 부모들이 여기에도 있다. 장애인과 난치병 환자의 부모들이다. ‘아이가 혼자 살아 있는 상태’는 그들에게 공포다. 부모 없이도 아이를 사람답게 살게 해야 할 사회안전망은 여전히 헐겁고, 세계가 이른바 ‘비정상인 사람들’을 배제하고 설계된 탓이다. 아이가 나보다 하루만 먼저 죽게 해달라고 부모들은 기도하며 운다.

자식 잃은 슬픔을 위로받지 못하고 조롱당하는 부모들 역시 여기에도 있다. 이태원의 부모들이다. 어이없는 죽음에 누군가는 설명을 내놓으라고 간청하면서 그들은 1년 전 그날 밤 아이들이 너무 오래 누워 있어야 했던 아스팔트 도로 위를 행진하며 울었다. 그러나 그들의 사연을 쓴 기사에도 모욕하는 댓글이 시커멓게 달렸다.

그러므로 여기는 전쟁 중이 아닌데도 전쟁터와 다를 바 없다. 부모들이 형체 없는 포탄을 맞고 도처에서 운다. 울리는 자들은 우리 안에 있다. 책임지지 않고 공감하지 않는 자들이다. 운이 좋은 덕분에 나는 건강하게 살아 있다. 억울한 이른 죽음으로 인하여 내 부모를 울게 하지 않았고 모욕당하게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끝까지 그런 딸이 될 자신이 없다. 폭력과 위험과 무능과 혐오가 넘쳐나는 여기에 사는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최문선 국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