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모든 역량을 쏟아 붓겠습니다."
지난해 이태원 참사 일주일 후 열린 '국가안전시스템 점검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약속했다. 재난안전사고 대응 체계를 전면 재검토해 더 이상 무고한 피해자를 만들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국회도 사회적 참사 방지를 위한 각종 법안을 내놨다.
하지만 불과 8개월 만인 올해 7월, 주말 아침 충북 청주시 오송읍 지하차도 안에서 14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태원에서처럼 오송에서도 112신고는 또 묵살됐고, 선제적 지휘 체계로 위기 경보에 대비하는 '이태원의 교훈'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정부와 국회가 '안전한 대한민국' 건설을 공언했지만, 1년이 지난 현재도 우리가 안전한 사회에 살고 있다고 자부하기 어렵다.
우린 도대체 안전사회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일까. 29일 한국일보가 이해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실로부터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이달 21일 기준 '범정부 국가안전시스템 개편 종합대책'의 올해 달성률은 51.2%다. 2023년이 겨우 두 달 남은 이 시점에도 연내 목표과제 41개 중 21개만 '완료(13개)' 또는 '완료 후 계속 추진(8개)' 상태이고, 나머지 20개는 미완이다. 아예 기한이 연장된 과제도 3건 있었다.
당초 정부는 사회적 참사 재발방지를 위해 97개 세부과제를 선정, 연도별 계획을 순차적으로 이행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뜯어보면 올해 '완료' 판정을 받은 과제 중에서도 실효성이 떨어지는 대책이 적지 않다. 예컨대 '반복 신고 감지시스템'은 112신고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119에 접수된 유사 신고를 포착하지 못한다. 감지 요건도 '1시간 내 3건 이상'으로 까다로운 편이다.
일회성 조치에 그친 탓에 실제론 별다른 효과를 내지 못한 대책도 있었다. 이태원 참사 피해를 키운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된 불법건축물 문제에서 국토교통부는 "지방자치단체가 시정명령을 이행할 수 있도록 협력을 완료했다"고 했지만, 전국 이행강제금 체납률은 지난해 29%에서 올해 6월 40%로 되레 늘어났다. 지자체 권한과 관련한 제도 개선이 병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진행 중'이나 다름 없는 과제들이 '완료 후 계속 추진'으로 분류되기도 했다. 출퇴근 시간안전사고 우려 해소를 위한 '수도권 전철 혼잡 완화방안'이 바로 그런 예다. 지금도 김포 골드라인 혼잡도가 200%를 웃도는데 '완료' 표현을 쓰는 것 자체가 쑥쓰러울 정도다. '소방 보고체계·상황전파 개선' 과제에서 계획한 '차세대 상황인지시스템'은 2025년 이후에나 구축 가능하다.
장마철을 앞두고 속도를 냈어야 하는 '지하공간 침수 방지' 과제는 정작 7월 들어 목표 시점이 불분명해졌다. 그 시기 출범한 기후위기 대응 범정부 태스크포스(TF)가 관련 대책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뒤 추진하는 게 적합하단 이유에서였다. 지하도로·지하도상가 등에 침수방지시설 설치를 의무화하는 자연재해대책법 개정안은 지난달에야 겨우 국회에 제출됐다.
정부에게만 책임을 돌리기도 어렵다. 국회도 정쟁만 일삼느라 안전 관련 법안 처리에 미온적이다. 핼러윈과 같은 '주최자 없는 축제'의 관리 책임을 지자체에 부과하는 재난안전법 개정안이 참사 직후 쏟아졌지만, 상임위 통과에만 10개월이 걸렸다. 해당 조항이 역으로 정부의 면피 논거로 쓰일 수 있다는 야당 측 우려 때문이었다. 결국 이를 근거로 안전관리 매뉴얼을 배포하려던 행정안전부의 계획도 1년 넘게 미뤄졌다.
재난 상황에서 체계적인 응급환자 구조∙이송 문제와 직결되는 법안들도 제자리 걸음이다. 이태원 참사와 같은 다수 인명사고에 투입되는 재난의료지원팀(DMAT)의 운영 근거(응급의료법 개정안)는 법제사법위원회에, 구조∙보건당국 간에 응급 환자에 대한 정보를 신속하게 주고받을 수 있게 하는 '119법'은 행정안전위원회에 머물러 있다. 인파사고를 재난 유형에 포함시키는 법안도 아직이다.
그렇게 '설마'하는 마음으로 미적대던 사이 '오송 참사'가 터졌다. 첫 거리두기 없는 핼러윈을 맞아 대규모 인파 운집이 예상됐던 이태원과 마찬가지로, 미호강도 범람 징후가 뚜렷했다. 사고 2시간 전부터 '주민 대피'와 '차도 통제'를 콕 집어 요청하는 112신고가 두 차례, '제방이 유실될 거 같다'는 119신고가 한 차례 있었지만 초동 대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점도 판박이였다.
올 여름 부모나 다름없던 오빠를 잃은 A(51)씨는 앞선 참사의 희생을 외면하는 안전불감증이 오송 침수사고의 원인이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는 "이태원 참사 때 신고를 무시한 게 그렇게 질타를 받았는데도, 오송에서도 112신고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면서 "정작 책임자들은 태평했을 생각을 하면 억장이 무너진다"고 말했다.
대형사고가 나면 정부와 국회가 대책을 쏟아내느라 호들갑을 떨고, 여론이 좀 잠잠해지면 갖은 이유를 들어 제도 정비나 규제 대책에 차츰 소홀해지다가, 아예 안전 요소를 망각해 또 대규모 사고를 자초하는 악순환이 계속 반복되고 있다. 채진 목원대 소방안전학부 교수는 "이태원과 오송 모두 공공의 안일한 대처가 문제였다"며 "효과적 재난관리를 위해서는 조직 간 진정성 있는 협력이 필수"라고 짚었다. 이윤호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명예교수는 "비상대책은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고 임하는 게 국가의 의무이자 도리"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