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레몬을 따는 사회

입력
2023.10.28 00:00
19면

사람이면 누구나 잘못된 사고나 행동을 할 때가 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일,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시작한 일, 섣불리 남을 오해한 일 등이 그 예이다. 이런 일로 체면이 깎이면 보통 처음에는 자책하지만, 곧 이런 혼잣말로 달랜다. '어쩔 수 없었어. 어디 나만 그래? 누구든 그럴 수 있잖아.' 원치 않은 결과로 언짢은 마음을 그럴듯한 이유를 대며 벗어나려는 것이다. 이처럼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을 합리화라고 하는데, 이는 자책감에서 벗어나려는 자기방어 기제의 하나이다.

이솝의 우화 중 '여우와 신 포도 이야기'는 자기 합리화의 유명한 예이다. 목마르고 굶주린 여우가 길을 가다가 먹음직스러운 포도를 봤다. 여우는 주렁주렁 열린 포도를 향해 힘껏 뛰어 보지만 번번이 닿지 않아, 끝내 포도를 먹을 수 없었다. 여우는 결국 "저 포도는 아주 시단 말이지. 난 신 포도는 안 먹어"라며 돌아선다. 마음에 들지만 가질 수 없었던 포도에 대한 여우의 마음, 바로 '신포도형 합리화'이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사람이 마치 처음부터 원하지 않았다는 양, 자신을 위로하는 유형이다. 경품 당첨에 목을 빼고 기다렸지만 허탕을 친 사람, 기필코 사 보려 했던 콘서트 표 구매에 실패한 사람이 허전한 마음을 달랠 때 종종 듣는다.

'달콤한 레몬형 합리화'는 그 반대의 경우로,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신 레몬을 두고 '그래도 먹을 만하다'고 믿는 것이다. 레몬이 시다고 왜 말하지 못하는 것일까? 자신의 소유거나 자신의 선택에 따른 결과일 때, 비록 나쁜 결과가 예상될지라도 순순히 인정하기가 쉽지 않다. 신 레몬에 대한 불만은 곧 그것을 선택한 자신에 대한 굴욕이므로 애써 긍정적으로 인식하려 한다.

그래서인지 합리화 중에서도 달콤한 레몬형은 자칫 긍정 언행으로 오인될 때가 많다.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는 기특한 경우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합리화는 그저 정당성을 부여할 뿐, 궁극적으로 정당한 것은 아니다. 개인이 겪는 곤란함, 아픔, 그리고 슬픔을 드러내지 못하는 상태가 과연 바람직할 것인가? 내가 소유한 것, 내가 처한 상황이 꼭 긍정적 평가를 받아야만 하는가? 이런 현상은 개인이 주위 눈치를 많이 봐야 하는 닫힌 사회에서 빈번하다.

개인도 이럴진대, 하물며 사회 전체가 달콤한 레몬형에 빠진다면 아주 위험하다. 자기방어를 넘어 '우리 방어'가 되는 순간, 레몬을 베어 물고 있는 개개인의 고통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더 빨리 가야 하고, 짧은 시간에 일을 끝내야 하고, 하루 만에 응답해야 하는 무수한 과업들에 이런 기제가 작동하고 있는 것 같다. 소비자의 주문 후 29분 이내 장보기 대행서비스를 완료하겠다는 광고, 급한 것이든 아니든 새벽 배송한다는 무서운 문화를 사회 구성원 다수가 '그럴 수 있지'라며 합리화하는 순간, 과로를 권하는 사회가 되고 마는 것이다.

사회적 차원에서 달콤한 레몬형 합리화에 빠지는 것은 일종의 집단 최면이다. 나보다 우리가 중요한 한국 사회에서는 별수 없다고들 한다. 그러나 내 것, 내가 선택한 레몬이 꼭 달콤해야만 하는 것인가? 어려움을 숙명인 듯 받아들이는 사회도, 어려움을 말해도 비난받지 않을 열린 사회도 바로 구성원 개개인이 만드는 것이다.


이미향 영남대 글로벌교육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