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 인공지능(AI) 기업 루닛은 4년 전만 해도 연 매출 2억 원을 넘기지 못한 스타트업이었다. 기술을 개발해도 건강보험 적용에 막혀 의료 현장에 도입이 더뎠기 때문이다. 루닛은 해외로 눈을 돌렸다. 2021년과 22년 루닛의 해외 매출 비중은 각각 70.3%, 79.5%가 됐고, 올 상반기에는 86%로 올랐다. 특히 올해는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 지역 진출에 가속도가 붙으며 상반기에만 전년 전체 매출을 뛰어넘는 164억 원에 도달해 연 매출 300억 원 달성을 앞두고 있다.
26일 업계에 따르면 국내 바이오·헬스케어 기업들이 '신(新)중동' 특수를 타고 활발하게 현지 시장에 진출하고 있다. 루닛은 이날 사우디 정부가 국가 전략과제 ‘비전 2030’의 일환으로 추진 중인 ‘헬스케어 샌드박스’의 디지털 의료 구축 사업에 참여한다고 밝혔다. 헬스케어 샌드박스 사업 규모는 총 90조 원에 달한다. 앞서 루닛은 지난 7월 사우디 '가상병원 프로젝트'에도 암 검진용 AI 솔루션을 지원하기로 했다.
또 다른 의료 AI 기업 코어라인소프트도 이날 아랍에미리트(UAE)에 있는 메디컬 유통기업 MHC와 AI 솔루션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컴퓨터단층촬영(CT) 영상 분석을 통한 폐암 조기 진단 기술을 유럽 5개국 암 검진 프로젝트에 적용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중동에서도 사업 영역을 넓혀나갈 계획이다.
진단기업도 중동 진출 성과를 내고 있다. 이앤에스헬스케어는 최근 UAE에 혈액으로 유방암을 진단하는 키트를 공급하는 계약을 맺었다. 셀트리온헬스케어, 대웅제약, SK바이오팜 등 의약품 기업들도 앞다퉈 중동에서 품목허가를 받으며 시장 진입을 노리고 있다.
생산시설 건설도 줄줄이 예정돼 있다. SK바이오사이언스는 제3국 백신 기반 확보를 위한 '글로컬라이제이션'의 타깃을 태국에 이어 중동으로 잡고, 현지 법인 설립을 통한 생산 인프라 확대를 기대하고 있다. 메디톡스는 두바이에 보툴리눔 톡신 생산시설을 지어 글로벌 진출 거점을 마련할 계획이다. 미코바이오메드는 사우디 산업단지에 진단장비 생산 공장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이처럼 국내 바이오·헬스케어 기업의 중동 진출이 확대된 데는 현지 의료 시스템 변화와 시기가 맞아떨어진 영향이 컸다는 분석이 나온다. 중동은 최근 경제 성장과 석유산업 외 신사업 발굴을 위해 의료 인프라를 확충 중이다. 세계보건기구(WHO) 등에 따르면 걸프협력회의(GCC) 국가의 보건의료 분야 지출 규모(경상의료비)는 2022년 104억1,000만 달러에서 매년 5.4% 성장해 2027년 135억5,000만 달러에 달할 전망이다. UAE와의 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을 포함해 중동과 경제적 파트너십을 강화하고 있는 정부의 움직임 역시 업계의 중동 진출을 가속화하고 있다.
한 헬스케어 기업 관계자는 "현지에서 국내 의료기술을 높게 평가하는 만큼 향후 중동의 투자에 기술력을 갖춘 국내 기업의 진출이 확대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