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가들에게 레퍼토리란?

입력
2023.10.28 04:30
19면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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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이고르 레비트(Igor Levit)를 청중들은 종종 불친절한 음악가라 여긴다. 성격이 괴팍해서가 아니다. 그가 무대에서 들려주는 유별난 레퍼토리 때문이다. 여기서 레퍼토리란 작곡가가 죽은 이후에도 꾸준히 연주되어 음악 박물관에 살아남은 작품을 일컫는다. 레비트는 잘 알려지지 않은 혹은 흔히 연주되지 않은 허를 찌르는 선곡으로 청중을 놀래 왔다. "늘 똑같은 곡만 무대에 올리는 피아니스트들이 있죠. 하지만 음악가라면 레퍼토리로 모험을 불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레비트 공연의 차별성은 청중을 개의치 않는 선곡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연주자들은 공연을 준비하면서 어느 곡을 선곡할지, 어떤 순서로 조합할지 세심히 골몰하기 마련이다. 자신의 연주력과 음악적 취향을 효과적으로 드러낼 가장 중요한 전략이기 때문이다. 프로그램 구성은 이미 연주자에 대한 수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레비트는 연주 시간이 짧은 곡보단 길이가 긴 곡을 선호한다. 연주자에겐 깊이 있는 표현을, 청중에겐 충분한 몰입을 이끌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의 시험을 견뎌내야 위대한 음악에 이를 수 있습니다." 게다가 피아노란 악기에 레퍼토리를 한계 짓지 않는다. 피아노를 위해 작곡되지 않았거나, 피아노로 연주하기엔 너무 거대한 곡들도 그의 관심 대상이다. 말러나 바그너의 거대한 관현악곡들을 피아노로 압축해 즐겨 연주한다. 다른 피아니스트들은 좀처럼 시도하지 않는 과감한 선곡이다.

청중들이 원하는, 혹은 청중들이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을 연주해야 하지 않냐란 질문에 레비트는 이렇게 대답한다. "많은 사람들이 찾는 작품이 곧 가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수많은 걸작들을 생각해 보세요. 초연 당시 청중들의 몰이해에 고통받았던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반대로 수많은 범작들도 떠올려 보자고요. 작곡가 살아생전엔 대중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더라도 후대에 이르러 완전히 잊힌 작품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레비트는 새로 태어난 낯선 음악이 태생적으로 소수의 취향에 머물지 몰라도 100년 후 생존할 걸작들을 발굴하는 것이 연주자의 사명이라 주장한다. 뛰어난 작품은 시대를 앞서기 마련이다. 그는 몇 번이고 강조한다.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을 들려주고 싶습니다." 오는 11월 21일 예술의전당에서 레비트는 브람스의 합창곡, 바그너의 관현악곡, 허쉬의 창작곡, 리스트의 피아노소나타를 연주한다. 레비트가 아니면 듣기 힘든 유별난 프로그램이다. 이번 공연에 대한 가장 큰 기대감은 이 레퍼토리 덕택이다.


조은아 피아니스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