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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내가 망토를 휘날리며 밤하늘을 난다. 그의 눈 아래로는 칠레 수도 산티아고 시내가 펼쳐진다. 초능력 인간일까. 화면에 감도는 음산한 기운은 세상 구하기 또는 정의구현과 거리가 멀다. 아니나 다를까. 사내는 어느 집에 침범해 다짜고짜 한 여성을 공격하고 피를 빤다. 사내는 흡혈귀. 평범한 뱀파이어는 아니다. 그는 악명 놓은 칠레 군부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1915~2006)다.
피노체트는 1973년 쿠데타로 권좌를 차지했다. 당시 살바도르 아옌데 칠레 대통령은 대통령궁을 지키다 사살됐다. 피노체트가 집권한 1990년까지 칠레 곳곳은 피로 물들었다. 그런데 칠레 국민대다수가 소름 끼치게 두려워하던 피노체트가 아직 살아 있다고? 피만 있으면 언제 죽을지 모를 영생의 삶을 살고 있다고? 영화는 발칙한 상상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영화 속 피노체트(하이메 바델)는 프랑스혁명 전에 태어났다. 유럽 대륙 속 혁명의 열기를 피해 칠레로 숨어들었다. 기회를 노리던 그는 권력을 쟁취했고, 마음껏 피를 맛볼 수 있는 지위에 올랐다. 민주화 이후 자연사를 가장해 종적을 감췄으나 한 섬에 은신해 여전히 살아간다.
영화는 직설적이다. 독재자들은 종종 피바람을 불러일으킨다. 피를 부르는 독재자의 이미지는 흡혈귀의 본성과 겹친다. 심장에 십자가가 박히지 않는 한 죽지 않는 흡협귀의 불멸성은 상징적이다. 독재자들은 죽어도 그들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폭정을 펼칠 정치인들은 어느 곳에나 언제든 등장한다. 요컨대 영화 속 피노체트는 칠레 안팎 모든 파쇼 정치의 망령인 셈이다.
피노체트가 죽지 않자 자식들은 불만이 크다. 재산을 제대로 분배해주지 않아서다. 피노체트 본인만 영생의 삶을 도모하는 것이 못마땅하기도 하다. 피노체트의 아내와 최측근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는 피노체트와 주변사람들의 탐욕을 보여주며 비극적인 칠레 현대사를 반추한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공포물이다. 피노체트가 누군가의 심장을 움켜쥐는 장면, 심장과 피를 믹서기로 갈아서 들이키는 모습 등이 솜털을 세운다. 국민의 고혈을 짜내 축재하기에 바빴던 독재자에 대한 풍자가 서늘하다. 섬뜩한 공포 영화인 동시에 신랄한 정치 영화인 셈이다.
불멸의 피노체트를 죽이려는 이는 있다. 피노체트는 ‘암살자’의 접근과 실체를 알면서도 모른 척한다. 성적 착취가 가능하다는 판단에서다. 피노체트는 아내와 최측근의 눈까지 속일 정도로 교활하고 악랄하다. 막판 몇 차례 반전이 있다. 생각지도 않은 현대사의 주요 인물이 등장한다. 그가 피노체트와 별반 다르지 않은 인물이라는 영화의 판단은 매우 급진적이다. 한국에선 만들어질 수 없을 듯한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