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대백제전에 참가한 일본 불교계와 박물관 관계자들을 만났다. 일행 중에는 대마도박물관 학예사도 있었다. 20대 중반의 청년으로 석사학위를 마치고 자원해서 대마도로 왔단다. 대마도에 자원한 이유를 물었더니 한국 문화를 가까이서 공부하고 싶다고 한다. 앞으로 자주 교류 협력하자고 도움을 청했다.
대화 주제는 '부석사 불상'의 행방으로 옮겨갔다. 필자는 청년에게 이렇게 말했다. 일본 관음사가 도난품을 돌려받고 싶은 것처럼 부석사도 약탈품을 돌려받고 싶은 것은 당연지사, 인지상정이니 이를 가지고 양쪽에서 혐한이나 반일을 선동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하였다. 무엇보다 관음사가 부석사의 역사성을 부정하며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상대를 짓밟는 것으로 철회할 것을 관음사에 권하라고 하였다. 약탈품도 취득시효가 완성되어 소유권이 성립한다는 주장은 법률로써 다퉈볼 여지가 있다. 하지만 부석사 역사를 부정하는 것은 한국 불교 전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전국 사찰의 반발을 일으키고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이것은 향후 한일 양국의 불교 협력에도 큰 장애가 된다고 덧붙였더니, 다행히도 청년은 눈앞의 이익보다 미래를 보더니 내 말에 공감했다.
부석사 불상이 1330년 서주 부석사에서 제작됐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또 1370년대 서산 일대를 침탈한 왜구가 강탈하였다는 사실도 일본 역사학계, 언론계는 물론 1심과 2심 재판부도 인정하였다. 그런데도 지난 2월 2심 재판부가 부석사의 동일성을 부정하고 시효취득을 인정, 부석사가 패소하였다. 여기에는 추정과 허구가 동원되었다. 왜구가 방화한 부석사는 폐사되고 1530년경 같은 지역에 같은 이름의 부석사가 '공교롭게도' 창건되었다는 것이다.
폐사의 근거로 제시한 1407년 자복사 목록에 부석사가 없는 것이 이유이다. 그러면 자복사 목록에 없는 수덕사, 동화사 등 대표 사찰도 권리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부석사가 소개됨으로 이때 새로 창건했다는 주장도, 1481년 편찬 동국여지승람에 부석사가 이미 소개되었으니 추정이 틀린 셈이다. 따라서 이를 증거로 내세운 2심 판결은 부당하다.
이제는 오랫동안 상실의 고통을 겪은 부석사와 서산시민이 입은 역사의 상처를 치유할 기회가 필요하다. 서주 민초 32인이 발원한 관음상의 앞날은 '희망'이다. 26일 대법원 선고가 불상의 '소유'로서 끝이 아니라, '가치 공유'로 새롭게 시작되기를 대마도 청년과 함께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