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량 급발진 의심 사고 당시 핸들을 잡았던 운전자들에게 형사책임을 묻지 않는 수사 결과와 법원 판결이 잇따르고 있다. 그러나 민사소송에선 여전히 제조사 승률이 100%다. 현행법상 손해배상을 받으려면 차량 결함 등의 사고 원인을 피해자가 직접 밝혀내야 하기 때문이다. 형사적 판단과 민사소송 결과가 배치되는 모순이 계속 발생하는 만큼 제도 개선 필요성이 제기된다.
26일 한국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강릉경찰서는 지난해 12월 강원 강릉시에서 일어난 급발진 의심 사고로 손자를 잃고 교통사고처리 특례법상 치사 혐의로 입건된 60대 할머니 A씨에게 최근 ‘혐의 없음’ 처분을 내렸다. 당시 A씨가 몰던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은 갑자기 앞선 승용차를 들이받고 600m가량 내달린 뒤 지하통로에 빠지며 가까스로 멈췄다. 이 사고로 차에 함께 타고 있던 A씨 손자 이도현(당시 12세)군이 숨졌다.
수사를 진행한 경찰은 “브레이크(제동장치)에 문제가 없다”며 제조사 손을 들어준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감식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A씨 측이 제조사를 상대로 낸 민사소송에서 이뤄진 민간 전문기관의 감정 결과가 국과수 분석과 상반된 것도 경찰이 A씨에게 죄를 묻기 어렵다고 판단한 근거가 됐다. 국과수는 ‘운전자가 변속레버를 굉음 발생 직전 주행(D)에서 중립(N)으로, 추돌 직전 N→D로 조작했다’고 밝힌 반면 법원에서 선정한 민간 기관은 “변속레버 조작은 없었다”는 결론을 내놨다.
최근 법원 판결 역시 비슷한 흐름으로 가고 있다. 6월 대전지법은 2020년 12월 서울 한 대학에서 승용차를 몰다 경비원(당시 60세)을 치어 숨지게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B(56)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지하주차장을 나와 시속 10㎞로 우회전하던 B씨 차량은 13초 동안 가속하면서 시속 68㎞로 피해자를 들이받은 뒤, 보호난간에 부딪힌 뒤에야 멈췄다. 재판부는 운전자가 피해자를 피하려고 방향을 틀었고, 여러 차례 브레이크등이 들어온 점 등으로 미뤄 차량 결함을 의심하기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검찰이 항소해 2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 법무법인 래안 정광일 변호사는 “블랙박스 영상이나 폐쇄회로(CC)TV 화면, 차량의 굉음, 목격자 진술 등을 근거로 개인이 상황을 제어할 수 없었다고 판단될 경우 운전자에게 형사책임을 묻지 않는 수사 결과와 판결이 나오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반면, 2010년 이후 한국교통안전공단에 접수된 급발진 의심 사고 787건 중 제조사 책임이 인정된 사례는 1건도 없다. 제조물 책임법이 제조사가 아닌 피해자가 제조물의 결함과 피해를 입증해야 배상을 받을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어서다. 개인이 첨단공학 지식을 갖춘 전문가가 즐비한 제조사와 싸워 이기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제조사들은 소송 과정에서 설계나 실험자료 등을 영업비밀이란 이유로 공개하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실제 2016년 부산 남구 감만동에서 일가족 4명이 숨진 ‘부산 싼타페 사고’의 경우 운전자에 대해 불기소 처분이 내려졌으나, 유족 측은 자동차 제조사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에서 1, 2심 모두 패소했다. 2020년 발생한 BMW 급발진 사고가 유일한 민사소송 승소 사례지만 대법원의 최종 판결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다. 도현군 유족도 민사소송을 통해 결백을 입증하겠다는 입장이지만 냉정히 말해 승소 확률은 낮은 편이다.
시민들 사이에선 제조물 책임법을 손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법 개정 절차가 본격 진행된 적은 없다. 정부나 국회가 제조사, 산업계에 미칠 부담을 우려해 미온적인 것도 원인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 손자를 잃은 강릉 급발진 의심 사고를 계기로 도현군 할머니에게 죄를 묻지 말아야 한다는 탄원서가 전국에서 빗발치는 등 제도 개선에 공감하는 여론이 강하게 형성됐다. 도현군 유족이 신청한 국민동의 청원이 5만 명 동의 요건을 충족해 제조물 책임법 일부 법률 개정안이 국회로 회부되면서 법 개정 논의가 이뤄질 수 있는 토대도 마련됐다. ‘도현이 법’이라 불리는 이 법안은 ‘차량에 결함이 없었다는 사실을 자동차 제조업자 등이 입증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정 변호사는 “법조계 역시 소비자에 입증 책임을 과도하게 지우는 건 문제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라며 “전보다 적극적인 법 개정 움직임이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