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 뚫린 게 마약뿐일까

입력
2023.10.23 16:00
26면

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요즘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는 조선 후기 세도정치 시기를 이렇게 설명한다. "삼정의 문란으로 백성의 고통이 심했다. 농민들은 법으로 정해진 것보다 훨씬 많은 액수를 부담했다. 어린아이와 죽은 사람에게도 군포를 거두는 일이 일어났다. 환곡의 폐해가 특히 심했다. 수령과 향리의 부정이 심해지면서 환곡을 빌리지 않았는데도 이자를 내는 경우까지 있었다. 삼정의 문란과 수탈, 사회 혼란은 농민 봉기의 배경이 되었다.”

□수십 년 역사를 단 몇 문장으로 설명했기 때문일까. 지배층은 백성의 고통을 몰랐고, 아무 대책도 내놓지 않은 것처럼 서술한다. 그러나 삼정의 문란이 심각하다는 건 군신 간의 공통된 인식이었다. 1852년 철종은 ‘민생이 고달프고 초췌해졌다. 나눠 주지도 않은 곡식을 독촉하여 받아들이다니 슬프도다. 수령들은 교구할 방법이 있으면 반드시 일일이 조목조목 전달하라’고 하교한다. 최고실권자 김좌근도 이자를 더 받거나, 규정 수량을 초과하여 환곡을 대출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랬다. 조선 지배층도 문제가 뭔지 알았다. 그러나 고치지 않았다. 매관매직의 비리 구조를 깨야 하는데도, 그 구조가 깨질 경우 발생할 손해를 감수하려 하지 않았다. 철종이나 김좌근은 개혁 대신 탐관오리의 개인적 자숙을 요구하는 데 그쳤다. 상황은 다르지만, 세계 최저로 떨어진 대한민국 출산율도 마찬가지다. 20년 전부터 경고가 울렸지만, △여성의 사회적 진출 △성의식의 변화 △자산가치 양극화 등 시대 변화에 맞춘 개혁은 이뤄지지 않았다.

□눈 뜨고 당하는 건 이뿐만이 아닐 수 있다. 당장 편한 걸 선호하고 힘든 개혁엔 머뭇거리는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엄중해야 할 국방과 치안 기강이 약화하고 있다. 병사들에게 휴대폰이 허용된 뒤, 일선 중대장에게 ‘우리 애 잘 챙겨달라’는 전화가 늘고 있다고 한다. 연예인들의 마약투약 의혹이 빈번해지는 것도 좋은 징조는 아니다. 신종 마약 펜타닐에 쑥대밭 된 미국 샌프란시스코 얘기가 현실화할 수도 있다. 이전 세대의 노력과 희생으로 이뤄낸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유지하려면 냉정한 반성과 궤도 수정이 필요해 보인다.

조철환 오피니언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