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을 꾸역꾸역 위장에 밀어 넣어 폭식하듯 책을 탐하던 때가 있었다. 콘크리트 벽으로 단절된 세상과 시대를 향한 지적 욕망은 도무지 채워지지 않는 허기와 다름없었다. 1980년 반독재 학생시위 '서울대 무림사건'으로 난데없이 불법 연행되어 고문당한 후 전국의 구치소와 교도소를 옮겨 다닌 수감생활(그로부터 40여 년 뒤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책이 없었다면 버틸 수 있었을까. 문학평론가 김명인(65) 인하대 국어교육과 교수는 사식처럼 책을 넣어주며 옥바라지를 한 동갑내기 부인 유윤숙씨에 대한 미안함을 못내 감추지 못하면서도, 2년 8개월의 옥살이를 지금의 자신을 구성한 시기로 끝내 긍정했다.
"대학원이 따로 없었어요. 감옥이 제겐 아카데메이아였죠. 필요한 교양은 모두 감옥에서 독서로 익혔습니다. 평론가가 되기로 마음먹은 것도 그때였죠. 300권 정도를 읽었는데 계속 독방에 있었다면 더 많이 읽을 수 있었을 거예요."
출소 4년 후, 그는 '전환기의 민족문학(풀빛 발행·1987년)'에 발표한 '지식인문학의 위기와 새로운 민족문학의 구상'으로 단숨에 비평계의 샛별로 떠올랐다. 70년대 백낙청을 중심으로 한 민족문학론을 '소시민적 지식인문학론'이라 비판한 비평문은, 80년대 말의 민족문학 주체논쟁의 도화선이 됐다. 혼란한 시대 상황에 절필과 복귀를 오가다 2005년 인하대 교수로 자리를 잡았고 내년 2월 정년퇴임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는 더 이상 감옥에서 읽지 않는다. 그간의 연구와 사유를 압축한 서재를 갖춘 예닐곱 평 연구실이 있으리니. 날카로운 필치와 엄정한 윤리 감각으로 평단에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비평활동도, 한국 사회의 비판적 공론장을 대변하는 잡지 중 하나인 '황해문화'의 편집주간(30주년 기념 120호 발간을 끝으로 물러났다)으로서 주요 쟁점마다 치열하게 개입한 읽기와 쓰기가 이곳에서 이뤄졌다.
지난 13일 찾은 인천 미추홀구 인하대 교정 내 그의 연구실은,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조금은 황량하고 듬성듬성한 인상을 풍겼다. 그것은 조만간 연구실을 비워야 하는 그가 곧 귀촌할 강화도의 한 마을도서관에 2,000권 정도를 기증하는 등 '서재 비우기'에 열중하고 있기 때문일 터. 연구실 한쪽 벽면 전체를 차지한 책장은 인위적으로 한 움큼 벼려낸 듯 텅 빈 구역이 눈에 띄었고, 빽빽하게 꽂혀 있던 책들은 옆지기를 잃고 맥없이 쓰러져 있다. 비스듬한 블라인드 틈 사이로 비치는 햇살 속에 아른거리는 책 먼지만이, 이곳이 수천 권의 책이 자리했던 공간임을 증거할 뿐이다.
올해 수상자로서 참석한 임화문학예술상 시상식이 전날 있었던 탓인지 서재의 주인은 다소 피곤한 안색이었다. 2018년 처음 대장암 진단을 받은 그는 2019년 수술과 항암치료를 거쳐 지난해 완치 판정까지 받았으나, 지난해 가을 무릎 염증과 패혈증 치료 과정에서 간에 악성 종양이 또 생긴 것을 알게 됐다. 지난겨울부터 격주로 몸속 세포를 공략하는 항암치료로 인해 피부는 거칠어졌고 모발은 힘을 잃었다.
하나, 2시간 가까이 오로지 '책'을 주제로 이야기하는데도 안광은 또렷했으며 입은 지칠 줄을 몰랐다. 동서고금과 장르를 가리지 않고 온갖 작가와 작품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스콧 니어링, 케테 콜비츠, 루쉰, 도스토옙스키, 체 게바라… 이따금 여유롭게 유머를 툭툭 던지는 모습에서는, 오히려 인생의 한 단락을 마무리하는 후련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제가 어렸을 땐 이쁘장했어요. 비평을 발표할 때면 아이돌 부럽지 않게 여성팬들이 찾아올 정도였다니까요."
연구실의 책장은 흡사 '백화점' 같았는데, 칸칸마다 나름의 기준을 두고 명확하게 정리된 구획이 꼭 각 층마다 상품의 종류를 달리한 모습을 연상시켰다. 꼭대기층은 역사, 그 아래 몇 층은 철학과 미학, 비교적 손이 잘 닿는 가슴팍 높이에는 현재의 한국 사회나 신자유주의를 진단하는 동시대의 책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또 페미니즘과 생태주의. 오히려 삶의 대부분의 시간에 천착한 문학과 비평, 그리고 황해문화 지난호들은 다소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다.
"문학을 전공했지만 문학공부보다 딴 걸 많이 했어요. 철학 책이 많죠. 마르크스, 헤겔, 아렌트, 아도르노, 루카치… 니체 전집도 있고요. 프랑스 철학자들… 푸코, 들뢰즈, 알튀세르. 페미니즘 책은 시몬 베유나 보부아르 같은 고전적인 것들이 있고요. (새물결출판사의 '사생활의 역사' 전집을 가리키며) 최근엔 미시사에 관심이 가요."
내년 가을 이사를 목표로 강화도에 짓고 있는 새집의 서가는 기껏해야 2,000권 정도. 집과 연구실 두 공간을 발 디딜 틈 없이 메운 책을 정리하는 것이 중대한 과업이 됐다. 어떤 책을 남기고 처분할지 기준을 세우는 것도, 처분의 방법도 마땅치가 않은데 냉혹하게 책과 거리를 둬야 할 시점에 책을 사고야 말고서는 "시대에 뒤떨어지거나 정신의 허기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드는 책들이 자꾸 나와 방법이 없다"고 페이스북에 고백한다. '견물생심'인 줄 알면서도 꼬박꼬박 매주 일간지 서평면을 챙겨 탐나는 책을 휴대폰에 틈틈이 메모해둔다.
이쯤 되면 목표를 향한 진실성에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으나, 어찌 되었든 그가 세운 서재 정리의 원칙은 간결하다. 첫째, 더 이상 읽지 않을 책은 방출한다. 둘째, 앞으로 공부하고 읽을 책은 남겨둔다. 셋째, 그럼에도 ‘문학을 공부했던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보여주거나 사연 품은 책은 간직한다.
지난 시절의 한국문학을 대부분 덜어냈다. 시집 500여 권을 사위가 운영하는 인문교양출판사 '읻다'에 보냈다. 학자로서 연구의 기반이 됐던 한국문학 관련 텍스트와 연구서, 교재 등 200여 권도 함께 내보냈다.
어떤 문학은 간직되었다. 그동안 읽다 말다를 반복했던 대하소설이나 특별히 아끼는 작가의 전집이 대표적이다. 조정래의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과 박경리의 '토지', 최명희의 '혼불', 그리고 최인훈 전집 등. 시선이 '무기의 그늘' '바리데기' 등 황석영의 소설이 꽂힌 칸에 머물렀을 때, 그는 "애증이 교차하지만 남겨놨다"고 말끝을 흐렸다. 대체로 수십 년 전 인쇄되어 누렇게 바랜 책 일색인 책장에서, 유독 빳빳하고 광택이 나는 새 책이 모인 칸에는 장류진, 윤이형, 김금희, 백수린, 권여선, 김초엽 등의 작품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우리 문학의 미래라고 생각하기에 신간 소설은 계속 읽고 있어요." 김우창, 백낙청, 채광석 등 다른 비평가들의 책을 두기로 하는 데에는 비평가로서의 자의식이 서려있다.
일평생 활자와 의견으로 밥벌이했으나, 그에게도 독서는 꾸준히 노력해야 하는 습관이다. 집중력과 시간을 앗아가는 유혹이 도처에 널려있기 때문이다. 어느 날 그는 집에서 부지불식간에 유튜브를 다섯 시간이나 들여다봤다는 사실을 직시한다. 화들짝 놀라 매일 세 시간 이상 유튜브를 볼 수 없도록 사용시간 제한을 설정했다. 책깨나 읽는 교수도 바짝 정신 차려야 겨우 읽는 세상에 '책을 읽자'는 구호가 지나치게 순진한 건 아닐까. 그러나 김 교수는 오히려 '이런 세상'이기에 책을 읽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신자유주의는 사람들의 모든 육체적, 정신적 능력을 고갈시킬 정도로 뽑아먹죠. 비정규직이나 프레카리아트(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서 등장한 신노동자 계층으로 '불안정한 무산계급'을 의미)처럼 하루 종일 몸을 바쳐 일해야 겨우 생계를 유지하는 이들은 정말 책 읽을 시간이 없어요. 독서가 계급성이 있는 건 옛날부터 사실이에요. 하지만 '책을 읽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읽어야 바뀌죠."
그에게 책은 자기 삶의 주체성을 재구성하거나 삶을 풍부하게 만드는 원재료다. 물론 독서만이 답은 아니다. 다양한 사람을 만나거나 여러 사건에 부딪치는 수도 있다. 하지만 비경제적이고 우회적인 계기다. 삶의 선택지를 제공하고 메타인지를 발휘해 자신을 성찰할 수 있도록 하는 효과적인 방법이 '독서'라는 거다.
단순히 읽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독서를 통해 능동적으로 자신의 세계를 직조해가는 과정이다. 교육현장에서 만난 학생들이 시험을 준비하며, 이른바 '필수 도서' 같은 것을 섭렵하지만 그저 지식과 상식의 습득에 그치는 점이 그는 안타깝다. 표면이 아닌 이면을 들여다보고, 현실 속 복잡한 문제를 고민해 보며, 다양한 개념의 상대적 위치를 그물 엮듯 구성해 보는 것이야말로 독서를 통한 '진짜 공부'라 김 교수는 믿는다. 그렇지 않은 독서를 두고 그는 '지식의 패스트푸드'를 섭취하는 행위라 일컬었다.
"책을 읽지 않으면 자신의 행보나 정체성을 바꿀 기회가 영원히 사라집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단순화되면서, 일종의 각자도생하는 개미들처럼 사는 양상이 반복되고 유전됩니다. 이렇게 10년, 100년이 지나면 인간이 인간이 아니라 모두 좀비가 될 것 같아요. 너무 극단적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