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전세사기' 의혹에서 임대인 정모(59)씨가 주변 공인중개사무소나 금융권의 도움 없이는 단기간에 수십 채의 건물을 매입해 수백 건의 임대차계약을 체결하는 일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피해자들은 "공인중개사나 금융기관의 묵인 또는 방조가 있었을 수 있다"며 철저한 수사를 요구하고 있다.
23일 한국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정씨 일가가 운영했던 중개사무소 3곳 외에도 정씨 측 물건을 다수 중개한 부동산들이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해당 부동산들은 근저당권이 많이 잡힌 빌라와 오피스텔의 위험성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임차인들에게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피해자들은 "계약 당시 공인중개사들이 정씨를 '수원 부동산 큰손'이라며 안심시켰다"고 입을 모았다. 피해자 한모씨는 "부동산 직원들이 정씨를 보자마자 엄청 깍듯이 모셨다"며 "정씨는 직원들을 하대하는 등 갑질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기억했다. 정씨는 이러한 중개소 직원들에게 많게는 수백 만원의 수수료를 건네며 조직적으로 세를 확장해 나간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김진유 경기대 도시교통공학과 교수는 "일반적인 공인중개사들이 취급을 안 하는 매물을 일부 중개사가 적극적으로 소개했다면 임대인과 특별히 밀접한 관계일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해당 부동산들은 정씨와의 유착 관계를 부인했다. 정씨와 임차인 사이에서 다수의 계약을 성사한 것으로 알려진 한 부동산의 대표는 "정씨와 공모를 한 부분은 전혀 없다"며 "적정 수준의 중개수수료를 받았고, 정씨와 따로 만나 식사를 한 적도 없다"고 해명했다.
정씨가 금융권과도 친밀하게 지내며 전세대출을 원활히 받을 수 있도록 했다는 의혹도 있다. 2019년 정씨 건물에 들어온 세입자 박모(31)씨는 "당시 정씨 건물은 근저당이 많아 전세대출이 불가하다는 답변을 받았는데, 정씨가 추천한 은행에 갔더니 대출 승인을 해줬다"며 "최근 피해 사실을 알고 그 은행에 다시 갔더니 '이 건물이 어떻게 대출 승인을 받았냐'고 되묻더라"고 말했다.
정씨의 사업을 잘 아는 지인은 "건물주 하나 잡아서 대출을 내주면 지점장 입장에선 엄청난 성과"라면서 "은행 직원들이 정씨를 자주 찾아 같이 밥도 먹으며 관계를 유지했다"고 증언했다. 김진유 교수도 "임차인이 전세대출보증을 받았을 경우, 은행은 사고가 나도 돈을 되돌려받을 수 있기에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임대인하고 친분 관계가 있으면 눈 감아줬을 수도 있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대출에 관여한 은행관계자들은 친분과 관계 없이 절차대로 대출이 이뤄졌다고 주장했다. 정씨 일가 부동산에서 수 차례 임차인의 대출을 승인해준 대출상담사 A씨는 본보와의 통화에서 "심사는 본사에서 하기 때문에 친하다는 이유만으로 대출을 받을 수 없는 구조"라고 반박했다. 이 외 은행권 관계자들도 "당시는 근저당과 무관하게 (전세)대출이 가능했다"며 "절차대로 진행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