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를 대표하는 베스트셀러에 법정스님의 ‘무소유’(無所有)가 있다. 1976년 출판돼 100만 부가 판매된 우리나라 수필을 대표하는 스테디셀러다.
이 무소유의 히트는 ‘불교=무소유’라는 프레임이 씌워지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불교는 무소유를 주장하는 종교가 아니며, 법정의 무소유 개념에는 치명적 오류가 있다. 무소유란 ‘소유가 없는 것’으로 적게 가지는 절제와 검약이 아니라,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다. ‘나는 자연인이다’와 같은 삶은 ‘최소주의’일 뿐 무소유가 아니라는 말씀.
인도에는 진짜 무소유를 주장하는 종교가 있다. 불교와 동시대 만들어진 자이나교다. 이들은 무소유로 인해, 오늘날까지도 옷을 입지 않고 맨발로 걸어 다닌다. 그래서 이들을 ‘허공을 입은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이런 자이나교가 진정한 무소유다. 자이나교에서 불교는 소유를 떨치지 못한 집단이었다. 해서 이들은 붓다 당시 불교를 ‘탐착을 가진 소유자들’이라고 비판했다. 법정의 무소유보다 더 최소였음에도 소유라는 비판에 직면했던 것이다.
붓다는 자이나교의 무소유 비판에 대해 역으로 비판한다. ‘자이나교는 예의와 염치를 모르는 이기주의자들’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옷을 입는 것은 소유의 문제기도 하지만, 상대에 대한 예의와 배려 역시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갈 때, 그에 맞는 옷을 입는 것을 생각해 보라. 그런데 자이나교는 무소유에 매몰되어 모든 사람 앞에서 나체로 다닌다. 이를 붓다는 ‘이기심에 의해 도덕적인 배려가 없다’고 비판했다. 바바리맨이 범죄가 되는 것과 같은 비판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붓다는 문제의 핵심은 소유가 아닌 집착에 있다고 봤다. 우리는 앞선 세대에 비해 더 많이 소유하고 있지만, 더 많은 갈등과 불행을 느끼고 있다. 우리의 행복은 풍요로만 채워지는 것이 아니며, 또 결핍으로 도덕적 우위를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행복을 컨트롤하는 것은 소유와 결핍이 아닌 ‘집착’이기 때문이다.
붓다는 집착의 구조 속에서 3인칭 시점으로 한발 물러나 보라고 가르친다. 이렇게 되면 소유의 문제를 넘어선 무집착의 자유로운 해법이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첨예화된 자본주의 속에서 행복의 코드를 잃지 않는 방법이 아닌가 한다.
무집착은 ‘결핍 속의 자유를 추구하는 무소유’나 ‘최소주의를 통해 만족하는 미니멀리즘’이 아니다. 물질 속에서의 대자유를 말하는 현대사회를 관통하는 가치다. 인간 욕구는 닫아걸거나 억제하는 게 아니라, 승화시켜야만 해소되는 관조의 영역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