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증 장애를 가진 동료로서 다른 중증장애인들의 삶을 지지할 수 있는 지금의 제 일자리가 저는 좋습니다.”
군포시자립생활센터에서 2년째 동료지원가로 일하고 있는 이기순(60)씨는 말문을 떼자마자 눈시울이 붉어졌다.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을 투명필름에 써주세요”라는 요청에 이씨는 ‘나는 동료지원가이다’라는 한 문장을 느리게 써 내렸다. 결핵성 척추염을 앓으며 19세 때 하반신이 마비된 그는 휠체어에 앉은 채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카메라 렌즈 앞에 섰다. 10분도 채 안 되는 짧은 대화를 이어가는 동안 이씨는 동료들을 상담하고 취업을 도왔던 기억을 떠올리며 ‘행복했다’, ‘기뻤다’, ‘보람됐다’, ‘좋았다’, ‘흐뭇했다’, ‘감사했다’ 등의 서술어를 반복했다. 두 달 뒤면 그는 실직한다.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예산안에 따르면, 통상 ‘동료지원가 사업’이라 불리는 ‘중증장애인 지역맞춤형 취업 지원 사업’에 대한 내년도 정부 예산이 전액 삭감(23억 원→0원)되면서 2019년부터 전개해 온 이 사업이 폐지될 상황에 놓였기 때문이다. 이대로라면 전국의 동료지원가 187명은 올해 말 전원 해고된다.
동료지원가 사업은 중증장애인이 상담, 자조(self-help)모임 구성 등 동료지원을 통해 실직 또는 비경제활동 상태에 있는 다른 중증장애인을 만나 취업 활동에 참여하도록 연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고용노동부는 지난 9월과 10월에 발행한 보도설명 자료에서 ‘제도개선을 비롯하여 사업 활성화를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매년 예산집행이 저조했다’면서 ‘보건복지부의 「장애인 자립생활센터 지원사업」 내 ‘동료상담’과 유사 중복되고 사업실적이 부진한 「중증장애인 지역맞춤형 취업지원 사업」의 종료를 결정하게 되었다‘라며 예산 삭감의 당위를 설명했다.
사업 수행기관 실무자들은 정부의 이러한 결정에 대해 일방성을 지적했다. 피플퍼스트 성북센터 김하은 활동가는 “동료지원가 사업은 사회 참여에서 배제돼 왔던 사람들이 서로 만나 교류하고 지지하면서 노동으로 하여금 사회에 편입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정부가 나서서 설계하고 진행했던 결과물”이라며 “우리는 동료지원가 제도를 중증장애인의 사회활동 자체를 노동으로 인정한 최초의 사례라고 본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김씨는 “최중증 장애인들에겐 애당초 아무것도 없던 척박한 노동 환경이었다”며 “그들이 사회활동을 할 수 있는 기틀이 겨우 만들어지고 있는데, 정부가 이제 와서 생산성과 효율, 정량적 성과의 잣대를 들이대며 작디작은 기회마저 아예 없애려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중증장애인의 노동시장 진입이 경증장애인에 비해 훨씬 어려운 현실에서 그나마 있던 정책적 관심마저 사라지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도 나온다. 한국장애인고용공단 고용개발원이 조사한 ‘2022년 하반기 장애인 경제활동 실태조사’에 의하면 중증장애인의 경제활동참가율(23.2%), 고용률(21.8%)은 경증장애인의 절반 수준에 그쳤으며, 실업률(5.9%)은 1.7%P 높게 나타났다.
고용노동부는 ‘동료지원가가 신속히 다른 일자리를 가질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할 계획’이라고 밝혔지만, 직장에서 해고될 위기에 처한 당사자들은 회의적인 입장이다. 피플퍼스트 서울센터에서 2년째 동료지원가로 근무 중인 발달장애인 박경인(27)씨는 “태어날 때부터 엄마·아빠 얼굴도 모른 채 시설에 보내진 뒤로 정신적으로 많이 아팠는데, 동료지원가 활동을 계기로 친구들과 함께 일하면서 버겁고 힘들던 것들이 사그라들었다”면서 “자기 결정권을 갖게 해준 이 일자리가 사라지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헤어지고, 지금 이 일상을 지속할 수 없게 된다고 생각하면 너무 슬프고 절망스러워서 견디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군포시자립생활센터에서 동료지원가로 일하는 정태민(26)씨는 “동료지원가 제도는 제가 태어나서 줄곧 시설에만 살다 자립해서 사회에 나왔을 때 사람들과 제대로 대면하고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줬다”면서 “가장 소외되고 열악한 곳에 있는 사람들을 국가가 챙기지 못하는 이 현실이 서글프다”라고 토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