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수원시 일대에서 발생한 대규모 전세사기 의혹 사건에서, 주범으로 지목된 임대인의 임대차계약을 다수 중개했던 공인중개사들이 모두 사무실 문을 닫고 잠적한 것으로 확인됐다.
19일 한국일보가 임대인 정모(59)씨의 매물을 주로 중개한 수원 시내 3개 부동산중개소를 찾았더니, 중개소 세 곳 모두 문을 닫았거나 간판을 내린 폐업 상태였다. 각 중개소 내부에는 아직 치우지 못한 집기들이 널려 있었고, 명패에는 이름이 사라져 있는 등 흔적을 지우려 했던 정황이 보였다.
중개소 세 곳은 모두 전세사기 의혹의 정점에 선 임대인 정씨의 주택을 전문적으로 중개한 곳이었다. 세 곳 모두 정씨 일가의 친인척이나 측근들이 운영하던 곳으로 추정된다. 본보가 관련 계약서 등을 확인한 결과, 정씨 아내의 친인척이 운영한 것으로 알려진 A 중개소는 2014년부터 정씨 일가 물건을 중개한 것으로 드러났다. A 중개소가 위치한 사무실에는 현재 성인PC방 간판이 달려 있었고, 문은 잠겼으며 내부는 비어 있었다. 인근 상가에서 일하는 한 자영업자는 "A 중개소 대표가 최근 임차인에게 성인PC방 허가가 나온다면서 속이고 한 달 전쯤에 도망갔다"고 전했다.
B 중개소는 정씨 아들이 대표로 있는 곳인데, 역시나 사무실 불이 꺼진 채 책상과 의자만 덩그러니 남겨졌다. 우편함에는 국민건강보험, 국민연금공단 등이 보낸 고지서가 수북이 쌓여있었다. 아들 정씨는 한 감정평가법인에서 근무하다가 퇴사한 후 최근 부모의 부동산 임대사업을 도운 것으로 알려졌다. 주변 얘기를 들어보면 이곳은 지난달 중순까지 영업을 하다가 갑자기 문을 닫았다.
C 중개소는 정씨 비서로 알려진 또 다른 정모씨가 2021년 1월부터 대표로 일했던 곳이다. B·C 중개소에서 각각 재계약을 한 피해자 이모(31)씨는 "C 중개소는 7월쯤에 문을 닫았는데, 지난달 중순부터 A 중개소 대표로 추정되는 남성이 들락날락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문제의 중개소들이 정씨 일가를 끼고 서로 관련을 맺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정황이다.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책임을 져야 할 공인중개사들도 모두 공범인데 사라지고 말았다"며 원통함을 호소했다. 2017년에 A 중개소를 통해 계약한 양모씨는 "계약 당시 근저당이 많이 잡혀있어서 불안했는데 부동산 대표가 정씨는 임대업을 하는 유명한 사람이니 한시름 놓으라고 했다"며 한숨을 쉬었다.
피해자들은 문제의 부동산중개소 세 곳뿐 아니라, 정씨 주택을 소개한 다른 중개소들도 유착 관계에 있을 수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올해 6월 입주한 피해자 함모(32)씨는 "한 부동산에서 계약하던 중 갑자기 직원이 '임대인 정씨와 전속으로 계약을 하는 곳'이라며 A 중개소로 데려갔다"며 "갑자기 그곳에서 계약을 진행해 수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기억했다.
전세사기 의혹을 수사 중인 경찰은 정씨 주변 공인중개사들의 공모 여부를 파악하는 등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경기남부경찰청 반부패·경제범죄수사대는 18일 사기 혐의로 공인중개사 등 9명을 추가 입건했다. 이로써 수사 대상 피의자는 임대인 정씨 가족 3명과 부동산 관계자 15명 등 모두 18명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