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은 양가적이다. 정확히는 돌봄이란 행위에 수반되는 감정이 그렇다. 돌봄의 대상을 향한 관심과 애정이 동력이 되지만 마음 한편에서 치미는, 내 삶을 찾고 싶은 욕망 또는 죄책감과 싸워야 한다. 돌봄은 결국 '누군가의 대기조'가 되는 삶을 선택하는 것이므로.
그래서 돌봄은 노동에 가깝지만 그 가치는 '사랑'이란 이름으로 쉽게 뭉개지고, 한 개인의 희생으로 '퉁쳐진다'. 게다가 그 대상이 아이가 아닌 부모라면 상황은 더 잔인하다. 그 끝은 성장이 아닌 죽음이기에 함부로 나의 돌봄이 끝나기를 바랄 수도 없다.
미국의 소설가 린 틸먼(73)의 '어머니를 돌보다: 의무, 사랑, 죽음 그리고 양가감정에 대하여'는 그런 맥락에서 매우 용기 있는 책이다. 죽음으로 향하는 부모를 돌보는 일에 대한 부정적 감정까지도 솔직하게 고백하기 때문이다. 희소한 뇌 질환을 앓다 지난 2006년 사망한 어머니를 11년간 돌본 작가는 그 돌봄의 기저에는 늘 '사랑'이 있지만은 않았다고 주저 없이 말한다. "나는 좋은 딸 역할을 연기했지만 거기에는 내 진심이 아닌 양심이 담겨 있었다."
돌봄은 그녀에게 자주 의무감에 따른 행위였다. 처음 돌봄을 시작한 2~3년을 작가는 이렇게 묘사한다. "내 삶이 좁아진 듯했다. 무기력하게, 포로가 되어, 넝쿨째 말라죽어가고 있었다. 우리 가족의 미래는 어머니의 미래에 구속돼 있었다."
사실 "여섯 살 때부터 어머니가 싫었다"는 딸은 스러져 가는 엄마를 보며 혼란스러워한다. 작가로서의 삶을 지키기 위해 두 언니와 간병인에게 돌봄 노동을 자주 전가했지만 죄책감에 괴로워했다. 그 혼란한 감정은 애초에 사랑을 바탕으로 한 딸과 엄마의 관계가 아니었기에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딸을 향한 타인의 칭찬에 질투하고 경청과는 거리가 멀었던, 작가의 말마따나 '기이한 생명체'로 여겨졌던 어머니가 숨지고 나서야 그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어머니를 몰랐다." 작가는 여느 작품처럼 "아픔 끝에 어머니를 사랑하게 됐다"는 가식적 결말을 내놓지 않는다.
투병과 돌봄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가운데 작가는 돌봄 위계의 강고함과 노인 의학의 무신경함도 드러낸다. 돌봄의 주체는 결국 여성, 그중에서도 유색인종이 도맡게 된다는 점이다. 어머니를 돌본 간병인들은 대부분 유색인종이라는 점이었다는 것에서 그들의 돌봄 노동에 기댄 백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도 돌아본다. 어머니의 병명을 찾기 위해 수없이 병원 순례를 하고도 정확하지 않은 진단과 치료, 홀대를 마주한 현실도 고발한다. "의학계가 노인을 취급하는 방식은 사회 전반이 노인을 취급하는 방식과 동일하다"는 작가의 말은 노년과 죽음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돌아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