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크리트를 노출하는 인테리어를 떠올려보자. 그것은 본래 개방감을 선사하는 세련된 양식이다. 실제로는 눈살이 찌푸려지는 허름한 결과물을 낳곤 한다. 뼈대를 드러내고도 완성된 것처럼 보이려면 정교한 마감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모양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세계는 이렇게 바뀐다'를 천천히 반복해서 읽었다. 가상의 르포 형식을 취하는 이 소설은 서사나 묘사를 들어낸 만큼 밀도가 높다. 단요는 작중 사회를 차근차근 검토하면서, 우리의 본질과 닿아 있는 생생한 질문을 구현한다. 이는 독자가 구체적으로 생각하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예를 들어, 사람은 사회적 영향력이 클수록 윤리적으로 까다롭게 행동해야 옳다. 국회의원이 전쟁에 찬성하는 일은 일반 국민의 찬성보다 중대하므로, 더 엄격하게 평가되어야 한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안 중요한 사람’은 안일해도 괜찮은 걸까? 개인들은 일부러 불성실하게 생활하여 책임을 회피하는 전략을 취할 수 있다. 그럼 다소 경솔하게 행동하더라도 ‘윤리적’이라고 평가받는다. 이건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든다. 무엇을 빠뜨린 걸까?
소설은 ‘수레바퀴’로 시작한다. 1년 전 어느 날부터 모든 사람의 머리 위에 수레바퀴가 나타난다. 정의로움을 표시하는 청색과 부덕함을 표시하는 적색으로 구성된 바퀴다. 착한 사람은 청색 비율이 높다. 정확히 말하면, 사람들은 청색 비율이 높은 사람을 착하다고 생각한다. 평범하게 선량한 사람은 청색이 65% 정도다. 나머지는 적색이다. 적색 비율은 그가 지옥에 갈 확률로 이어진다.
수레바퀴가 등장한 후로 사람들은 천국행과 지옥행을 눈으로 확인한다. 누가 사망하면 그의 수레바퀴에서 바늘이 빙빙 돌아간다. 바늘 끝이 청색에 멈추면 천국행이다. 온화한 빛이 망자를 감싼다. 바늘이 적색에 멈추면 망자는 지옥으로 끌려간다. 이는 초월적인 심판자가 주관하는 궁극적인 판결이다. 그리고 아무리 청색 비율을 높여도 재수가 없으면 지옥행이라는 사실이 사람들을 극도로 불안하게 만든다.
당연히 청색 비율을 높이는 방법이 전 세계적 관심사로 떠오른다. 철학이 인기를 끌고, 기후 정의 같은 사안이 커다란 지지를 얻는다. 사람들은 자신의 수레바퀴를 세세히 분석해 주는 앱을 사용하고 매일 셀카를 찍는다. 수레바퀴는 아주 예민하고 또 복잡하다. 수레바퀴가 사람을 평가하는 규칙에는 행위의 결과는 물론 동기와 환경이 참작되는데, 이 외에도 변수가 있다. 애초에 ‘정의’는 복지와 분배의 문제를 포함하는 복합적인 개념이다. 소설이 검토하는 바에 따르면 정치 성향이나 경제적 역할도 수레바퀴의 색깔에 반영된다. 작중 인물들은 복잡한 판단에 직면한다. ‘청색 비율이 낮아지기 전에 죽을까?’ ‘이런 세상에 아이를 낳을 것인가?’ 마비 상태에 빠지지 않으려면 “느낌에 기반한 선택보다는 정교한 방법론이 필요하다”(20쪽).
우리에겐 심판의 수레바퀴가 없으니 우리는 청색 노이로제에서 안전하다. 그러나 생각하지 않고 지나치기엔 작중 질문들은 존재감이 진하다. 우리의 본성에 접근하기 때문이고, 정교한 방법론의 세계에 뿌리내린 덕이다. 콘크리트의 단단함과 허구의 불온함이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