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작곡가 빈첸초 벨리니(1801~1835)의 오페라 '노르마'는 국내에서 단 세 차례(1986, 1988, 2009년) 공연됐다. 로마 지배하의 갈리아(옛 프랑스 영토)를 배경으로 드루이드교 여사제 노르마의 로마 총독과의 금지된 사랑과 배신, 질투를 아우르는 비극으로 어려운 기교 때문에 자주 공연되지 못한다. "역량이 뛰어난 성악가를 캐스팅할 여건이 안 된다면 공연하지 않는 게 낫다"(지휘자 로베르토 아바도)고 할 정도다.
벨칸토 오페라(화려한 기교와 창법을 중시하는 오페라)의 대표작인 '노르마'가 예술의전당 전관 개관 30주년을 기념해 26~29일 오페라극장에서 공연된다. 14년 만에 국내 무대가 성사된 것은 노르마를 연기할 소프라노 여지원(43)을 비롯해 역량있는 성악가들이 출연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비토리아 여(Vittoria Yeo)'라는 이름으로 이탈리아 등 유럽에서 주로 활동하는 여지원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타이틀 롤을 맡은 첫 한국인 오페라 가수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거장 지휘자 리카르도 무티의 선택으로 2015년 이 페스티벌에서 베르디의 오페라 '에르나니'의 여주인공 엘비라를 맡았다. 2017년에도 '아이다'의 아이다로 러시아 출신의 세계적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와 더블 캐스팅됐다.
일견 무명 오페라 가수의 깜짝 성공 스토리로 보이지만 여지원은 숱한 시행착오를 딛고 오뚝이처럼 일어선 음악가다. 지난 13일 예술의전당에서 만난 여지원은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은 수많은 좌절의 경험"이라며 "내 최고의 재능은 인내심인 것 같다"고 말했다.
노래를 좋아했던 여지원은 어머니의 권유로 고등학교 2학년 말부터 준비해 서경대 성악과에 입학했지만 눈에 띄는 학생은 아니었다. 성악가로서의 가능성을 찾아 2005년 이탈리아 유학길에 올랐지만 첫해에 음악원 입시에서 탈락했다. 콩쿠르 우승이나 명문 음악원 수석 입학과 졸업 같은 수식어가 따라붙는 여타의 '금의환향' 성악가들과는 다른 이력이다. 힘들었던 이 시기를 떠올릴 때 여지원은 한 가지만은 또렷하게 기억한다. "썩 점수를 잘 받지도 못했고 실력이 눈에 띄게 향상되는 학생도 아니었지만 정말 열심히 했다는 것만은 자신할 수 있어요. 당시 제 유학의 목표는 확실했어요. 뭐가 되지 않아도 좋으니 내 진짜 목소리를 찾아보자는 것. 조금만 늘어도 좋겠다는 생각이었고, 그래서 지칠 일은 없었죠."
그도 콩쿠르에 출전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탈리아에서 열리는 콩쿠르에 100번쯤 참가해 10분의 1쯤 입상했다고 한다. 그는 "콩쿠르 출전 목표도 입상이 아닌 무대공포증을 이기고 내가 부르고 싶은 노래를 어느 정도 내 마음에 들게 부를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고 돌아봤다.
29세 때 모데나 음악원에서 스승과 제자로 만난 불가리아 출신 소프라노 라이나 카바이반스카와의 인연과 2013년 리카르도 무티의 부인인 오페라 연출가 크리스티나 무티, 2015년 리카르도 무티와의 만남은 바로 이 좌절의 시기를 견딘 후 그에게 찾아온 기회였다. "세 분 모두 공통적으로 확신이 없는 제게 '내가 너를 뽑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어. 너에게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으니 그냥 노래하면 돼'라고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셨어요."
여지원의 고국 음악팬과의 만남은 2018년 신년음악회 이후 5년 만이며 오페라 전막 무대로는 2014년 대구국제오페라축제의 '투란도트' 류 역 이후 두 번째다. 2019년 이탈리아 라벤나에서 노르마 데뷔 무대를 가졌고, 이번이 한국에서는 처음 선보이는 노르마 연기다.
여지원은 아리아 '정결한 여신이여'(Casta diva)로 유명한 '노르마'뿐 아니라 다양한 베르디와 푸치니의 작품으로 유럽에 이어 미주로도 무대를 넓혀 가고 있다. 그는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은 지금도 여전히 자신의 목소리를 찾고 있다고 했다. "무대라는 곳은 두려운 상황이 많이 생기고 몸에도 늘 변화가 생기기 때문에 계속 실력을 키우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생각이에요."
이번 '노르마' 공연은 스페인 연출가 알렉스 오예가 이끄는 2016년 로열오페라하우스 제작 오페라 버전이다. 여지원과 이탈리아 소프라노 데시레 랑카토레가 노르마를 번갈아 연기하고 테너 마시모 조르다노, 메조소프라노 테레사 이에르볼리노, 베이스 박종민 등도 출연한다. 연주는 전설적 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1933~2014)의 조카로, 볼로냐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인 로베르토 아바도가 지휘하는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가 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