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균용 대법원장 후보자에 대한 임명동의안이 국회에서 큰 표 차이로 부결됐다. 헌정사상 두 번째다. 35년 전 정기승 후보자가 낙마한 사례가 있기는 하지만 당시 야당 의원들은 대부분 기권표를 던졌다. 이번처럼 과반이 넘는 반대가 나온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표결 이후 여야의 책임 공방은 주로 이 후보자의 자격 유무를 놓고 이루어졌다. 야당은 재산등록 때 비상장주식을 누락한 사례를 들어 도덕성에 문제가 있었다고 지적한 반면, 여당은 부결될 정도의 흠이 아닌데 민주당이 대법원장 임명을 정쟁의 대상으로 만들었다고 반박한다.
그러나 한 걸음 떨어져서 보면 이번 사태의 원인을 후보자 개인에게서 찾는 것은 대법원장 임명의 정치적 맥락을 놓치는 일이다. 우리 헌법은 대법원장 임명권을 대통령에게 주는 대신 국회의 동의를 얻도록 규정하고 있다. 여당이 다수일 때는 별문제가 없다. 판사는 엄격하게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지만 다양한 사회ㆍ경제적 문제에 대해서 나름의 견해를 가진다. 수십 년간 쌓인 판결을 토대로 보수적 혹은 진보적 성향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대통령은 스스로 판단해서 적절한 후보자를 지명하면 된다.
하지만 여소야대의 경우는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대통령이 후보자를 지명해도 야당은 얼마든지 부결시킬 수 있다. 법대로만 따지면 몇 번이라도 가능하다. 다만 야당에도 정치적 부담은 있다. 국민들의 공감을 얻기 어려운 이유로 사법부 수장 공백 사태를 초래하면 자신들이 비난받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대통령이 쓸 수 있는 정치적 지렛대가 생겨난다.
누구나 인정하는 훌륭한 후보자를 내세울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좋은 수다. 야당도 쉽게 반대하지 못한다. 그러나 실력도 뛰어나고 흠결도 없는 후보는 드물다. 대부분의 경우에 야당을 설득하고 이해를 구해야 한다. 실제로 다른 문제에서 야당에 양보하거나 혹은 외견상으로라도 그런 모양을 만들어야 한다. 대통령이 간곡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좋은 카드다. 그런 노력을 통해 야당으로 하여금 ‘인준에 반대했다간 역풍을 맞겠다’는 걱정이 들게 해야 한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는 그런 정치적 전략이나 수행 능력이 없어 보인다.
대통령은 취임 이후 야당 대표와 한 번도 안 만났다. 무엇보다 인사가 가장 큰 문제다.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아예 관심도 없는 느낌이 든다. 17개월 동안 20명 가까운 장관이 인사청문회 통과 없이 임명됐다. 그중에는 야당뿐만 아니라 국민의 눈높이에 안 맞아 여론의 비판을 받은 인사도 꽤 있다. 대법원장 국회 인준을 전후해 임명한 장관들의 면면을 보라. 민주당은 큰 정치적 부담 없이 대법원장 임명동의안 부결을 당론으로 정할 수 있었다. 유인촌, 김행과 대법원장 임명권을 바꿨다고 해도 할 말이 없다.
야당이 압도적 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회 동의를 얻어 대법원장을 임명하는 것은 고도의 정치 행위다. 치밀한 전략과 빈틈없는 실행이 요구된다. 대통령을 지지하든 아니든 국민들은 집권 세력에 그런 정치적 실력을 기대한다. 그러나 이번 대법원장 후보자 국회 동의 과정에서는 정부가 야당을 설득하려는 노력조차 제대로 보여주지 않았다. 심지어 실패한 후에 책임지는 모습도 찾아보기 어렵다. 35년 전 정기승 대법원장 후보의 인준이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을 때는 여당의 대표와 핵심 당직자들이 사퇴했다. 이번에는 용산에서나 여당에서나 아무도 물러나지 않았다.
대통령이 대법원장 임명에 실패한 것은 정치적으로 대참사에 해당한다. 그러나 지금 보여주는 모습대로라면 대통령실과 여당은 그것이 참사라는 사실조차도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