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운 여름이 지나고 선선한 가을 날씨가 돌아왔다.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낙엽도 곧 지게 될 가을은 고독의 계절로 불리기도 하는데 특히 남성들이 가을에 더 외로움을 느낀다고 알려져 있다. 물론 이 현상은 일조량과 그에 따른 남성 호르몬 유전자의 변화 때문이겠지만, 유전자의 세계에는 남성과 고독을 관련지을 만한 또 다른 이야기 주제도 존재한다.
사람의 23쌍 염색체 중 22쌍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염색체와 어머니로부터 받은 염색체가 동일 수준의 크기와 정보로 구성되어 있지만 성염색체라고 부르는 염색체 X와 Y는 한 쌍이라 하더라도 다른 쌍들과는 달리, 그 크기나 그 속에 담긴 유전자 정보의 내용 면에서 매우 다른 염색체이다. 염색체 X는 Y보다 3배 정도 크기가 크며 단백질 유전자는 약 900개가 저장되어 있어 약 100개를 가진 Y보다 9배 정도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
여성은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각각 염색체 X를 하나씩 물려받아 다른 22쌍들처럼 짝이 잘 맞는 XX 쌍으로 구성되지만, 남성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염색체 X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염색체 Y가 마치 억지로 맺어진 듯한 짝을 이루며 XY 쌍을 구성하게 된다. 즉, 염색체 Y는 남들처럼 제대로 된 짝이 없는 외로운 염색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여성들은 염색체 Y가 없어도 살아가는데 아무 이상이 없으니 염색체 Y는 사람의 생존에 꼭 필요한 존재도 아니다. 또한 일반적인 XY 구성이 아닌 XYY 구성 즉, 모든 세포마다 염색체 Y가 2개인 남성도 대략 1,000명 중 1명의 비율로 태어나는데 염색체 Y가 하나씩 더 있더라도 문제없이 잘 살아갈 수 있다. 반대로 염색체 X가 하나도 없다면 사람 세포는 생존할 수 없으며 XO 구성 즉, 염색체 X가 1개만 있거나, XXY 구성 즉, 염색체 X가 2개씩 있거나 하면 각각 터너증후군과 클라인펠터증후군처럼 임상적인 증상을 보이게 된다.
없어도 되고 많아도 딱히 문제가 없는 염색체 Y는 왜 아직도 유지되고 있는 걸까. 남성이 되는데 필요한 유전자들은 'SRY(Sex-determining Region Y) 유전자'를 포함해 단지 몇 개뿐인 것으로 확인되고 있는데, 그렇다면 염색체 Y에 있는 100여 개의 나머지 단백질 유전자들은 무슨 기능을 하는 걸까. 혹시 특별한 기능은 없이 그저 잉여로 남아있는 정보일 뿐인 걸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데 그 이유는 염색체 Y의 또 다른 특성 때문이다.
염색체 Y는 염색체 22번과 크기는 비슷한데 단백질 유전자 수는 약 5분의 1 수준으로 적은 정보를 가지고 있으며 염기서열 대부분이 단순한 글자들의 반복으로 채워져 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서도 단순한 패턴이 계속 반복되면 오히려 어지러움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염색체 Y 염기서열의 단순함도 연구에 상당한 혼란을 유발하고 있다. 실제로 염색체 Y 염기서열의 완전한 해독은 다른 염색체들보다 10년에서 20년 늦게 최근에 와서야 이루어지고 있다.
염색체 Y에 있는 유전자들은 남성의 불임 외에도 자폐증이나 신경계 질환들과 연관되어 있으며 특히 면역 관련 유전자들을 중심으로 남성에게서 여러 종류의 암 발생 및 진행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이 밝혀지고 있다.
흔히들 여성의 심리는 매우 복잡하지만, 남성의 심리는 상대적으로 매우 단순하다고 이야기들 하는데, 남성의 심리도 단순함 속에 존재하는 복잡미묘한 감정들 때문에 나름 이해하기 쉽지 않은 것처럼 염색체 Y에 존재하는 유전자들의 특성도 서열의 단순함을 극복하고 명쾌한 연구가 이루어지려면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염색체 Y는 오직 아버지에서 아들에게만 전달되므로 최초의 남성 조상을 찾는 연구에도 활용되고 있다. 가령 현재 거의 모든 남성의 염색체 Y는 약 25만 년 전 어떤 한 남성으로부터 유래한 것이고 중앙아시아 남성의 8% 그리고 전 세계 남성의 0.5%는 몽골제국 칭기즈칸의 염색체 Y를 물려받았다고 추정된다. 세계 인구가 80억 명에 육박하는 걸 감안한다면, 칭기즈칸의 Y유전자가 섞인 남성이 4,000만 명가량이라는 얘기다. 또 유럽 남성의 95%는 10명의 남성 조상으로부터 전해 내려온 염색체 Y 중 하나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인류가 하나 혹은 몇 안 되는 조상으로부터 이어져 온 친족과도 같은 인구 집단일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처럼 염색체 Y에서는 수컷의 내음 외에도 고독함과 단순함, 그리고 우리는 하나일 수 있다는 동질감의 향기도 묻어 나온다.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충돌들이 부디 더 이상의 피해가 없이 마무리되고 가을의 정취를 커피 향과 함께 편히 즐길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