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자세는 생애 주기별로 변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어릴 때는 주로 엎드려서 책을 봤다. 튼튼한 허리와 어깨를 가진, 그러니까 청년 이후에는 좀체 취하기 힘든 자세다. 책을 많이 읽어야 했던 대학원 시절엔 책상에 앉아서 독서를 했다. 뭐랄까, 누워서 읽으면 책들이 더 어려워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쨌든 책상에서 책을 읽는 습관은 최근까지 남아 있다. 문제는 책상에 다리를 올리고 독서를 한다는 거다. 이럴 때 하는 독서는 꼭 페이지가 잘 넘어간다.
그리고 최근, 기술의 발전과 함께 혁신적인 독서자세의 변화가 찾아왔다. 바로 tts(문자음성자동변환) 기능이다. 기계가 읽어주는 것이 어색하여 자주 쓰지 않던 기능을, 매주 장거리 운전을 하게 되면서부터 사용하게 됐다.
장거리 운전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음악도 라디오도 지겨워지는 순간이 온다. 그때가 책을 들을 시간이다. 어떤 책이든 원하면 들을 수 있게 되는 날이 올 거라고는, 오더라도 이렇게 이상하고 묘한 기계음으로 듣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지만, 듣다 보면 희한하게도 목소리와 발음은 사라지고 어느 순간 책의 내용만이 남는다. 그 순간이 좁은 차 안에서 해방되는 순간이다.
tts 기능을 사용하여 처음 ‘들은’ 책은 임영태 작가의 '지극히 사소한, 지독히 아득한'(2017)이다. 작가의 무려 7년 만의 신작이었는데 나는 6년 뒤에야 읽게 된 것이다. 아니, 듣게 된 것이다. 소설은 초로의 남자가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어서 시재 체크, 호빵의 투입 시간, 상품의 선입선출 같은 그야말로 지극히 사소한 일들이 그려진다. 남자의 부인도 편의점에서 주간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 일상 속에서 그들 부부는 나름의 목표를 세워 보는데, 그 목표는 슈퍼를 인수하거나, 동생에게 돈을 빌리거나, 이사 비용을 올려 받는다거나 하는 것이다.
그들 부부가 함께 밥을 먹을 수 있는 시간은 일주일에 단 한 번뿐이다. 그 시간을 쪼개어 그들 부부는 편의점과 대형마트가 들어서서 망해가고 있는 골목 슈퍼를 인수하려고 돌아본다. 그들 부부가 “사랑해”라는 이야기를 하는 순간은 ‘어제도 하루고, 오늘도 하루고, 내일도 하루’라고 말했던 형의 장례식 날이다. 그 장례식이 끝나고 그들은 ‘엔딩도 없이 내일도 모레도 되풀이되는 일’처럼 다시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러 간다. ‘살아 있는 한 끝나는 일이란 없다.’
소설의 마지막을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들었다. 도로는 꽉 막혀 있었고 사위는 어느새 어두워져 있었다. 허리는 뻐근했으며 어깨도 뭉쳤다. 일하는 동안 말을 많이 하느라 입도 바싹 말랐다. 주인공의 말을 곱씹다가 문득 내일이, 살아갈 날이, 아득해져 조금 울었다.
그럼에도, 되풀이되는 나날 중에도, 괜찮은 순간들이 있다. 바로 길 위에서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을 듣는 순간 같은 것 말이다. 좋은 소설은 언제나 우리를 어디로든 데려가 준다. 어디로든 가고 싶어서 우리는 책을 읽었다. 그리고 이제는 꽉 막힌 오후 여섯 시의 서해안고속도로에서도 잠시나마 아득한 나날들을 잊어 볼 수 있는 것이다. 독서의 자세는 무한히 변화하고, 또 변화할 수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