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대형 로펌으로부터 고액을 받고 법률의견서를 작성한 사실이 청문 과정에서 알려져 비판을 받았던 권영준 대법관. 그가 취임한 후 대법원이 60건에 가까운 대형 로펌 사건을 재배당한 것으로 확인됐다. "2년간 관계를 맺은 모든 로펌 사건을 피하겠다"는 인사청문회 당시 약속은 지킨 셈이지만, 국민 기본권 수호의 최후 보루인 대법관이 개인적 사유 때문에 '반쪽짜리 역할'밖에 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10일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법원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대법원은 7월 19일 취임한 권 대법관의 '회피 약속'에 따라 그가 물려받은 상고심 사건중 총 59건의 사건을 다른 대법관에게 자동으로 재배당(주심 변경)했다. 회피는 법관이 개인적 사유나 사건 당사자와의 관계 등의 이유로 사건을 공정하게 처리하기 어렵다고 판단할 때 법원 허가를 받아 스스로 직무를 피하는 것을 말한다.
권 대법관이 회피한 사건들은 모두 김앤장·태평양·세종·피터앤킴·율촌·바른 등 대형 로펌이 대리인으로 선임된 사건이다. 권 대법관은 앞서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재직 중 해당 로펌들의 의뢰를 받아 5년간 63건의 법률의견서를 써주고, 18억 원대 보수를 받은 것으로 드러나 논란이 일었다. "법 위반 사실이 없다"는 해명에도 불구하고 비판이 커지자, 권 대법관은 "(대법관이 되면) 취임 후 2년간 관계를 맺은 로펌 사건에 대해 모두 신고하고 회피 신청하겠다"고 공언했다.
권 대법관 취임 후에도 법조계에선 우려가 끊이지 않았다. 통상 대형 로펌이 맡는 사건의 규모와 난이도를 고려하면, 권 대법관이 이런 사건들을 맡지 않은 채로 대법관 역할을 온전히 수행할 수 있겠냐는 우려다. 수도권의 한 고법 부장판사는 "대형 로펌 사건들은 어려운 사건이 많아 실제로 기피하게 되면 재배당 받은 재판부에 사과까지 한다"면서 "(권 대법관 때문에) 59건을 미룬 것은 다른 대법관들에게 민폐"라고 지적했다.
뿐만 아니라 권 대법관이 회피한 사건 중 거의 대부분은 민사 사건(8월 31일까지 50건중 47건)이었다. '민법의 대가'로 인정받아 대법관 자리에 올라놓고도, 주된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대법원 재판연구관 출신의 한 변호사는 "대형 로펌 민사 사건은 다른 대법관들에게도 부담인데, 주요 사건을 회피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문제가 크다"고 말했다. 참여연대 김태일 사법감시센터 팀장은 "소부를 바꾸지 않고 단순히 주심만 변경했다는 점에서도 진정한 회피라고 볼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결국 권 대법관의 회피 약속은 그대로 지키기에 무리가 있고, 지켜지더라도 대법관 업무 수행에 악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는 비판이 나온다. 박용진 의원은 "대법원까지 올라갈 어려운 사건들은 대개 대형 로펌이 대리하는데, 권 대법관은 이를 알면서도 대법관 자리만을 위해 민폐 공약을 내건 것"이라고 비판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새로 올라온 (관련 로펌) 사건들은 애초 권 대법관에게 주심 배당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