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과는 또 달랐던 100년 전의 전쟁

입력
2023.10.12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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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2 이디스 카벨

벨기에 브뤼셀 베르켄달(Berkendael)의료원 부설 간호사 양성학교 교장이던 영국인 간호사 이디스 카벨(Edith Cavell, 1865.12.4~1915.10.12)은 1914년 7월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소식을 고향인 영국 노퍽주 노리치에서 듣는다. 벨기에 최초 간호학교인 베르켄달 교장으로 1907년 임용돼 일하다 모처럼 여름휴가를 얻어 가족과 시간을 보내던 중이었다. 독일군이 벨기에로 진격하고 있다는 보도에 그는 곧장 직장에 복귀했다.

그해 8월 20일 독일군은 브뤼셀을 점령했고, 그의 직장은 쌍방 병사와 민간인 부상자들을 함께 수용해 치료하는 적십자병원으로 운영됐다. 2명의 영국군 부상병이 그에게 탈출을 도와달라고 청한 건 몽스전투 직후인 9월 무렵이었다고 한다. 그는 그들을 중립국 네덜란드로 밀입국하게 도운 뒤 포로가 된 부상병 탈출 네트워크의 일원으로서 약 11개월간 연합군뿐 아니라 징병을 거부한 벨기에 청년 등 200여 명의 국경 피신을 도왔다. 그러다 이듬해 8월 5일 독일군에 체포됐다. 그는 동료 34명과 함께 10월 5일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국제사회의 인도주의 탄원에도 불구하고 12일 총살됐다.

영국 등 연합군 진영은 그의 죽음을 전선과 후방에 대대적으로 알리며 복수의 전의를 고양시켰다. 비록 이적행위를 했지만 민간인이고 여성이란 점이 부각됐다. 그를 모델로 한 징병 포스터가 제작되기도 했다. 국제사회의 성토에 독일 제국 정부조차 이례적으로 처형의 정당성을 알리는 보도문을 배포하기도 했다. “여성이 처형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끔찍한 일이지만 전쟁 중인 국가가 군대의 안전을 위협하는 범죄를 여성이 저질렀다는 이유로 처벌하지 않고 방치한다면···.” 당시만 해도 지금과는 또 다른 세상이었다.

전후 카벨의 시신은 영국으로 운구돼 웨스트민스터사원에서 국장을 치른 뒤 고향 노리치대성당 묘역에 안치됐다.

최윤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