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호? 아이고, 다시"... JTBC는 왜 그날 각성했을까

입력
2023.10.08 12:00
<대중문화 '역전의 명수'>
"너무 뻔해" 거절... '킹더랜드' 윤아·이준호 캐스팅 뒤 기사회생
'환혼' '3번 타자'로 투입됐던 고윤정... '무빙'으로 비상

편집자주

‘수ㆍ소ㆍ문’은 ‘수상하고 소소한 문화 뒷얘기’의 줄임말로 우리가 외면하거나 놓치고 지나칠 수 있는 문화계 이야기들을 다룹니다.


퀴즈 하나. 올여름 해외에서 가장 뜨겁게 사랑받은 한국 드라마는 무엇일까요. 8월 종방한 JTBC 드라마 '킹더랜드'입니다. 이 드라마는 세계 최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플랫폼인 넷플릭스에서 비영어권 드라마 부문 재생 시간 톱10에 11주 동안 이름을 올렸습니다. 한국 드라마 중에선 올 초 신드롬급 화제를 불러 모았던 '더 글로리'(13주)에 이어 두 번째로 오랜 기간 톱10에 머문 겁니다. '킹더랜드'가 '더 글로리'처럼 넷플릭스의 전폭적인 마케팅 지원을 받은 오리지널 시리즈가 아니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례적 성과입니다. 국내 시청률은 '킹더랜드'보다 6월 종방한 tvN 드라마 '닥터 차정숙'이 높았지만, '닥터 차정숙'은 '킹더랜드'와 달리 이 차트에서 한 번도 1위를 한 적이 없습니다. 한국 청춘 남녀의 로맨스('킹더랜드')에 해외 시청자의 관심이 더 뜨거웠단 얘깁니다.


JTBC도 처음엔 거절했던 '킹더랜드'

밖에서의 이런 활약과 달리 '킹더랜드'는 애초 국내 방송가에선 기대작이 아니었습니다. 여러 방송관계자에 따르면 이 드라마의 대본은 1년 넘게 표류했습니다. 재벌 2세 남자와 2년제 대학 출신이란 이유로 차별받지만 웃음을 잃지 않는 '캔디형' 여직원의 사랑을 줄기로 한 이야기는 '너무 뻔하고 구시대적'이란 눈총을 받고 번번이 외면당한 겁니다. 이 작품 편성에 선뜻 나선 방송사도, OTT도 없었습니다. JTBC도 지난해엔 이 드라마 편성 제의를 거절했던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이렇게 외면받던 '킹더랜드'는 어떻게 JTBC와 넷플릭스에 팔릴 수 있었을까요. 그룹 2PM 멤버인 이준호(33)와 그와 동갑내기인 소녀시대 멤버 윤아가 출연을 결정하면서부터입니다. 업계의 냉담했던 반응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이준호는 2021년 방송된 MBC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의 인기로 주가가 급등해 많은 드라마 제작사가 탐내는 배우였습니다. 20, 30대 남자 스타가 출연해야 드라마가 동남아시아 등 해외에 높은 가격에 잘 팔리기 때문입니다.

이준호가 섭외되자 JTBC의 행보도 180도 달라졌습니다. 지난해 편성을 거절했던 드라마를 다시 사들이기로 결정을 뒤집은 겁니다. 뻔한 로맨틱 코미디라도 누가 출연하고 연기하느냐에 따라 흥행작이 될 수 있다는 판단이었습니다.

"저희가 거절했다가 준호, 윤아가 캐스팅되면서 '아이고 이건 다시 해야 되겠구나' 해서 방송을 하고 있는 겁니다". 최근 JTBC 홈페이지에 공개된 시청자위원회 회의록엔 이런 내용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시청자 위원들이 '킹더랜드'의 예상치 못한 흥행에 놀라자 방송사 고위 관계자가 '킹더랜드' 편성 과정을 설명하다 나온 뒷얘기입니다. 업계에서 '미운 오리 새끼' 취급받던 '킹더랜드'가 준호와 윤아의 등판으로 야구 경기로 치면 9회 말 투아웃에서 역전 홈런을 날린 셈입니다. 소속사인 JYP엔터테인먼트 관계자에게 물어보니 '옷소매 붉은 끝동'을 끝낸 후 이준호에겐 100여 편의 대본이 들어왔다고 합니다. 이렇게 쏟아진 대본에서 이준호는 왜 '킹더랜드'를 택했을까요. "'옷소매 붉은 끝동'에선 애절하고 절절했는데 이번엔 머릿속을 비우고 편안하게 웃을 수 있는 작품을 해보고 싶었어요." 이준호의 말입니다.


'3번 타자'에서 신원호 마음 사로잡은 고윤정

'킹더랜드'가 이렇게 드라마 시장에서 흥행 반전을 썼다면, 올 상반기 K콘텐츠 시장을 빛낸 '역전의 명수'로는 배우 고윤정(27)을 꼽을 수 있습니다.

8월 공개된 디즈니플러스 '무빙'으로 스타덤에 오른 고윤정은 지난 1월 종방한 드라마 '환혼: 빛과 그림자'('환혼' 시즌2)에서 '대타 배우'였습니다. 극 중 무덕이 역을 맡은 박은혜가 방송 전 드라마를 떠나고 그 뒤 교체 투입된 정소민까지 시즌1에서 하차하자 고윤정은 시즌2에 긴급 수혈됐습니다. 같은 드라마에서 같은 역을 앞서 다른 배우가 연기했는데 그 뒤를 이어 출연하기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대부분의 배우가 꺼리는 일이기도 합니다.

출연 배우가 바뀌면서 드라마 이야기도 덜컹거렸습니다. 같은 등장인물의 얼굴이 갑자기 바뀌자 당황한 시청자의 비난이 제작진에게 쏟아졌고, 그 논란의 불똥은 고윤정에게도 옮겨 붙었습니다. 이렇게 '환혼'에서 홍역을 치른 고윤정의 진가를 알아본 건 다름 아닌 강풀(49· 본명 강도영) 작가였습니다. 최근 서울 삼청동 카페에서 만난 강 작가에 물어보니, 고윤정의 오디션 영상을 본 뒤 그를 제작진에게 추천했다고 합니다. "캐스팅되고 강 작가님과 밥을 먹었는데 '오디션 영상에서 낮은 톤의 목소리와 털털한 모습이 (극중) 희수와 비슷하다'고 생각하신 것 같더라고요"(고윤정). 낮고 묵직한 목소리 때문에 의기소침했던 고윤정은 강 작가의 얘기를 듣고 용기를 얻어 바로 체대 입시 학원부터 끊었습니다. '무빙'에서 체대 입시를 준비하는 고3이었던 희수를 자연스럽게 연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4~5개월 동안 학원에 다니며 액션 장면을 위해 몸을 만든 고윤정을 위해 강 작가는 제대로 '판'을 깔아 줬습니다.


"야, 나와." 희수는 교실에서 친구의 머리에 물을 쏟으며 괴롭히는 일진 무리를 향해 이렇게 말한 뒤 학교 소각장으로 걸어갑니다. 희수가 맞서야 하는 불량 학생은 17명. 머리채를 잡아 뜯기고 발로 차이면서도 희수는 일진의 우두머리를 향해 끝까지 달려듭니다. 영화 '비트'(1997)에서 "17대 1로 붙었다"는 고등학생 환규(임창정)의 허풍으로 '싸움의 전설'로 불린 그 상황을 '무빙'에서 고윤정을 통해 보여준 겁니다. 진흙탕에서 싸우는 연기뿐 아니라 체대 입시 훈련 과정 그리고 북한 초능력자 정화(양동근)에게 떠밀려 체육관 2층에서 떨어지는 장면을 모두 대역 없이 직접 연기한 그는 '무빙'으로 차세대 여성 액션 배우로 떠올랐습니다. 고윤정은 2019년 드라마 '사이코메트리 그녀석'으로 데뷔했습니다. 남들이 꺼리는 배역('환혼' 시즌2)도 마다하지 않고 연기 경력을 쌓고, 체대 입시 학원까지 찾아가 배역에 몰입한 신인 배우가 일군 반전입니다.

고윤정은 이제 드라마 '응답하라'와 '슬기로운' 시리즈로 유명한 신원호 PD와 손을 잡습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2020~2021) 시리즈의 스핀오프인 '슬기로운 전공의 생활'에 출연합니다. 이 '역전의 명수'가 쓴 반전은 어디까지 이어질까요.

양승준 기자